하느님의 빵-감사-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4,546 | 작성일 : 2013년 10월 4일

파일첨부 :

하느님의_빵.hwp (25.5K) [41]
교장실에 전화기가 울렸다.
재량 휴일이라 잔디 밭에 풀을 뽑다가 잠시 들어온 사이에 걸려온 전화이다.
이유인즉 어제 제 95차 감곡 성체 현양 대회에 참석하셨던 분인데
강론 원고를 얻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뜻하지 않게 일주일 전에 강론을 부탁 받아서 부담이 있었다.
강론을 읽기에 바빴지만 많은 분들이 강론 원고를 원해 이렇게
홈페이 주보를 통해 올려 놓습니다. 부족하지만
성체 성사에 대한 묵상 자료로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빵 
-감사: 성체의 사람이 되는 것-

+. 찬미 예수님

  제가 한번 여러 교우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이는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는 누구입니까? 오늘 이렇게 성체를 현양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거룩한 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도인 교우 여러분은 성체를 받아 모시고 은총을 가득히 받는 이들이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이들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요한 6.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히브리어로 빵은 ‘레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라함’, 즉 ‘부서지다, 사라지다’라는 무시무시한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빵이 생명의 양식인 것은 ‘죽음의 열매’ 이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인들은 생각했습니다. 빵을 먹으면서 그들은 빵에 있는 고통의 냄새, 죽음의 맛을 씹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죽어 싹을 틔우고, 열매가 열면 낫에 베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물이 섞이며 드디어는 뜨겁게 구워짐으로써 그 맛있는 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빵 속에 있는 눈물과 땀과 피의 맛은 바로 다름 아닌 인생의 맛, 그것입니다.
    베들레헴, 다시 말해서 ‘빵의 집’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도 빵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실제로도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땀과 피에 뒤범벅된 일생,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 46)라고 외치시며 숨을 거두셨던 저 십자가의 죽음에서부터 신약(新約)의 빵은 출발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빵 성체를 통하여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사 그 외아들을 보내 주시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또한 자기의 몸과 피를 내어 놓으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통 남김없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구원 사건이 성체성사입니다.
  예수님은 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5-57)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자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주님의 사랑은 성체성사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이 보다 더 큰 지극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1965년 이스라엘 문화재 관리국은 5-6세기 비잔틴 시대 성당을 발굴하여 마룻바닥을 발견했는데 펠리칸이라는 새를 그린 모자이크가 있었습니다. 펠리칸은 부리로 자기 가슴을 쪼아 피를 흘려 새끼들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당신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기르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새입니다.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합니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 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맙니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갑니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합니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습니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가 170장 ‘자애로운 예수’  는 “자애로운 예수 펠리칸이여 내 어이 이 큰 사랑 갚사오리, 주님은 당신 피로 온세상 모든 이 구해 주셨네”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문 ‘성체찬미가’에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나,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 만으로도 온 세상을 죄악에서 구해 주셨네”라고 노래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시려고 빵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니 그 안에 진리와 인성을 감추시고 오직 사랑만 드러내십니다.”
성 알폰소 리구오리 또한 “저희 믿음을 크게 하시고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빵의 형상 속에 숨으신 채 제대 위에 머물러 계십니다.” 라고 하면서, 숨어계심 그 자체가 우리를 위한 사랑임을 노래합니다. ‘숨어계심’은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어 청할 수 있도록, 그때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몽땅 쏟아 부어주려 기다리시는 그분 사랑의 방식입니다.
  베트남 공산정부에 의해 13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고 그 가운데 9년을 독방에서 감금상태로 보낸 뒤 풀려 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책 “지금 이순간을 사랑하며” 성체성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호치민(당시에는 사이공)에 있었던 저는 1975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대통령궁(독립기념궁)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저는 체포되었습니다. 제가 투옥되었을 때 뇌리를 스친 한 가지 괴로운 의문은 ‘계속해서 성찬 거행을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체포되었을 때 저는 빈손으로 즉시 떠나야만 했습니다. 다음 날 필요한 옷가지와 치약을 가져왔고 편지 쓰는 일을 허락받았습니다. 저는 ‘제게 위장약으로 쓸 포도주를 보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썼고 신자들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미사주를 위장약이라고 쓴 꼬리표와 함께 작은 병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리고 습기를 피하도록 손전등 안에 제병을 숨겨 보냈습니다. 경찰이 물었습니다.
“위장병을 앓고 있나요?”
“예”
“여기 위장약입니다.”
  그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제대였고 주교좌성당이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불사불멸의 약,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 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 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피가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그 거룩하신 몸과 하나가 되고,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온몸을 내어놓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내시어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시고, 우리는 새롭게 주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어놓으신 바로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삶 안에서 언제나 그분의 현존을 느낍니다.

  이런 놀라운 성체의 신비를 신앙으로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의 예수>라는 책의 저자인 앨버트 놀런 신부님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영적으로 변화 시킨다고 하십니다. 매일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에서 우리는 힘을 얻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건강, 나의 시력, 나의 마음, 나의 경험 등 각각에 상황에 따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바쳐야 한다. 친구와 친척들, 그 밖의 모든 사람, 지난 세월 우리를 성장케 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감사 드려야 한다. 기도거리는 무궁무진 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기도는 감사하는 삶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모든 번민과 고통, 실패와 실망에도 굴하지 않고 희망을 간직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임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때입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삶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위안이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7-18)
  한 연구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세 개의 집단으로 분리하였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좋든 나쁘든 하루 내내 그들이 겪었던 사건들을 매일 기록하였습니다.
둘째 그룹은 그날의 기분 나쁘고 부정적인 모든 체험들을 매일 기록하였습니다.
셋째 그룹은 그날 일어났던 일 중에서 그들이 감사하게 여기는, 곧 감사 여정을 매일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연구결과 세 번째 그룹인 감사 그룹은 측량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적, 심리적, 영적인 면에서 향상되었습니다. 신체적으로 그들은 더 많은 운동을 하였으며, 신체 증상들을 덜 겪었고 수면도 훨씬 향상되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들은 높은 수준의 주의력, 열광, 확고함과 에너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덜 겪었고 그들 삶의 부정적인 면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더 높은 차원의 낙관주의와 생명에 대한 만족을 체험하였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른 이들을 덜 부러워하고, 덜 물질적이며 더 관대하고, 종교 의식에 참여하고 종교적 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입니다.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좋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리스도교 삶에도 필수적이다. 사실 감사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감사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늘 맡은 직무이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지혜를 다하며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감사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자세이고 일입니다.
  심지어 신약 성경은 감사드리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계시합니다. 그리스어로 ‘아카리스토이’(acharistoi)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2티모 3,2)이고 그는 쫓겨나게 됩니다. 반면에 ‘에우카리스토이’(eucharistoi),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콜로 3,15).
  미사에서 감사기도 제 2양식의 서문은 많은 신학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다.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말은 놀라운 말입니다..
  미사 그 자체는 그리스도인 삶의 원천이고 절정이고, 제대로 말하면 성체성사(Eucharist)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어로 에우카리스티아(Eucharistia)로 ‘감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감사드리는 성체 성사에 참여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 안에 들어 높여지고 우리를 위해 그분이 승리하신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감사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성체적인 사람은 감사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괴리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감사드리는 사람입니다.
  아기 에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제일 많이 이끌어 내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감동되어 서둘러 우리에게 열 배의 은총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 다시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감사를 드린다면, 그 은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구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한 나의 감사는 끝이 없어서 나는 수많은 방법으로 그분께 감사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천사의 박사라  불리는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1273년 성니콜라오 축일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중 아주 깊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는 그해 겨울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가 7년 동안 작업해 왔던 최고의 걸작 ‘신학 대전’(Summa Theologia)의 작업을 멈추게 되고 그것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왜 그러느냐고 재촉하는 그의 친구제자에게 그는 단순하게 응답합니다. “내가 보았던 것(관상)과 내게 드러난(계시) 성체 신비에 비하면 내가 썼던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앙의 신비’로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 안에서 그는 하느님 자신의 깊은 신비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서방교회 교회의 위대한 박사는 벙어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깊은 지복직관에 쌓였던 이 사건이 다른 주위의 사람들에게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충격에 싸였던 모습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바로 그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로 강론을 끝맺겠습니다.

엎디어 절하나이다. 숨어 계신 천주성이여,
두 가지 허울 안에 분명 숨어 계시오니,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길 없삽기에
내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오이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만으로 믿음 든든하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죽으심을 되새기는 기념이여,
인간에게 생명주는 생명의 빵이시여,
비오니, 당신으로 내 영혼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
더러운 나,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이라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넉넉히 씻으시리라.
지금은 우러러도 숨어 계신 예수님,
이렇듯 애타하는 소원을 풀어 주사,
언젠가는 드러나실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환히 보며 복되게 하소서. 아 –멘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양업고님에 의해 2015-03-10 17:38:31 환희길 이야기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