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내 어머니~(고 김수환 추기경님)
작성자 : 김경숙 | 조회수 : 4,462 | 작성일 : 2009년 2월 21일
어머니, 내 어머니
(김수환추기경님)
어머니, 내 어머니
어느 날, 가을 들녘이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갔다. 어느 수도원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여니 가을 하늘 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그 모습이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운지 잃어버린 옛 고향 집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내가 어릴 때 그런 아름다운 뜰이 있는 집에 살아 본 일이 없건만 나의 마음의 고향, 어머니의 모습이 그 꽃밭에서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 데다가 젊었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어머니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이 글을 쓰지만 어머니의 무엇을 어디서부터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신 분, 나를 있게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신 분, 나를 위해서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목숨까지라도 바치셨을 분… 그런데 나는 아직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이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어머니는 가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의 뜻을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내 몸에서 느껴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의 무엇을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20여 년 전 독일에 있을 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ich)가 독일 국회에서 정초에 연설하는 것을 방송으로 들은 일이 있다. 그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독일, 독일,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독일… 이라는 우리 독일 국가의 뜻은 결코 객관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우리 독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요, 마치 우리 어머니가 객관적으로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세상 제일 가는 어머니듯이 그렇게 우리 독일도 우리에게는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내게 있어서도 우리 조국 한국이 제일이고, 우리 어머니 서중화 여사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어머니시다. 서중화 여사(徐仲和女史). 여기 `여사'는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처음 붙여 보는 칭호이다. 가신 지 30년이 되어 가는 우리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그런 대접을 받아 보신 일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여사'라는 존칭을 붙여야 할 만큼 사회적 신분이나 학벌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 지(地) 정도의 기초 한문과 한글 외에 아시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옹기 장사를 하신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신 후,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옹기나 포목을 이고 다니며 파는 생활을 거의 평생토록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말띠였는데 말띠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대로 그렇게 팔자가 드세다면 드셌다고 할 수 있는 한평생을 힘겹게 사신 분이시다. 내 마음에 새겨진 우리 어머니의 영상은 늙으신 모습이다. 70여 년의 온갖 풍상으로 주름진 그런 모습이다. 그러나 근엄하시면서도 미소를 지으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시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것 같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신 분… 차츰차츰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시고 초탈해지셨기 때문일까? 혹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드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 때문이었을까? 우리 어머니에게는 확실히 여장부의 기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시대를 잘 만나고 공부를 하셨다면 사회적으로도 이바지하는 큰 그릇이 되실 소질을 갖춘 분이었다. 그런 자질과 도량을 어머니는 언제나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당신의 친 형제, 친척, 이웃들에게도 두루 영향을 미치신 것 같다. 옛날 대구 천주교 신자 사이에 잘 알려진 서 동정(徐童貞)이라 불리는 분이 있었는데 남자이면서 동정을 지키신 이 어른이 우리 외삼촌이셨고, 이분은 주위로부터 그 인품과 돈독한 신앙심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어머니에게는 큰 오빠이면서도 또한 십수 년 연하인 누이 동생인 우리 어머니를 늘 존경에 가까운 경애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는 국량(局量)이 크고 남다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자신을 감추고 오로지 자식들이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그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 중에 가장 오랜 것은 내가 세네 살 때 국화빵 기계에 빵을 굽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그 때 어머니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당시 우리는 경북 선산(善山)읍에 살았는데 읍내 공터에서 곡마단인가 신파극인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구경꾼들을 상대로 빵을 굽고 계셨다. 또 어느 날 머리 위에 무엇인가 이신 어머니 손을 잡고 밑에는 푸른 물이 흐르는 어느 긴 철교를 무서워하며 건넌 일이 떠오른다. 그것 역시 어머니의 장사 길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 살림은 그 때부터 아버지보다도 어머니가 꾸려 나가신 것 같다. 선산서 우리 집 가까이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고, 어느 날 그곳 아이들과 내 바로 위 형과 그 또래의 아이들이 싸우는 판에 나도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가 던진 돌이 내 이마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다섯 살 때 우리는 선산서 군위로 이사했다. 큰 재를 하나 넘었고, 군위 용대동이라는 동네에 살 때에 나는 서쪽에 있는 그 산을 가끔 바라보았다. 특히 해질 무렵 그 산을 바라보곤 했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우리는 저 산을 넘어서 왔고, 지금 사는 이곳은 객지이며 저 산 너머 어디엔가 우리 고향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것 같다. 또 군위에서 살 때에는 우리 어머니와 나와 단 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가 있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옹기를 팔기 위해 먼 장에 갔다가,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면 어둑어둑해 가는 빈 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나 적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한길에 나가 어머니가 오실 신작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때 석양에 물든 그 산이 어린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산 너머 선산도 우리 고향은 아니었다. 우리는 도대체 정확히 어디가 고향이라고 하면 좋을지 모른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자라기는 선산과 군위에서 자랐고 내 위의 형들과 누이들도 대개 태어난 곳이 같지를 않다. 우리는 모두 8남매였는데 충남 합덕에서 시작하여 대구, 칠곡, 김천, 이렇게 태어난 곳이 다르다. 충남 연산(連山)이 고향이고 본관(本貫)이 광산(光山)인 내 할아버지 보현공(甫鉉公)은 독실한 신자로 병인교난(丙寅敎難, 1866-1868) 때 순교하셨고 아버지(永 )는 그분의 유복자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받던 많은 신도들이 그랬듯이 옹기 장수로 변신해 전전하다가 대구 처녀인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 뒤 옹기터를 경북으로 옮겼으나 장사가 잘되지 않아 이곳저곳으로 전전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친척도 아는 이도 전혀 없다. 그러니 어디를 가나 고향의 정감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경상도에, 그중에서도 대구에서 산 적이 시간적으로도 더 많으니 우리는 모두가 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는 우리 어머니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로 순수한 대구 분이시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가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군위로 이사해서 살 때에 형과 나는 그곳 초등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초등 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 아버지는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충청도 억양으로 나를 부르셨고 그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 흉내를 내던 것이 뚜렷이 기억나고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시고 바둑이나 장기로 소일하시다가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서울 동성(東星) 학교에 다닐 때 서울 서대문에 사시는 친척 고모님이 나를 보시자 우리 아버지 택호를 부르시면서 "너는 어쩌면 꼭 네 아버지를 닮았느냐?"고 하셨다. 그 때부터 나는 혹간 아버지 생각이 나면 스스로의 얼굴을 거울에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아주 적다. 그대신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시고 내가 성직(聖職)의 길로 가게 하신 분이시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 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司祭敍品)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 때 어머니는 깊은 감명을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부 5, 6학년)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다.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어서 자식들 교육에도 그만큼 엄격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고 그 때문에 내 위의 형과 나 우리 두 어린 형제를 더욱 엄하게 키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명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 우리는 어릴 때 거짓말은 물론이요, 욕같은 상스러운 소리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나에게 신앙을 심어 준 분은 물론 어머니시다. 게다가 형이 신학교로 간 후에 어머니와 나 둘이서 살았다. 큰 형들은 돈벌이를 한다고 집을 나가 살았다. 그 때 어머니는 매일 저녁 한참씩 긴 기도를 하셨고 나는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졸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 기도를 바쳐야 했다. 그러시고도 자기 전에는 다시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나 혹은 우리나라의 고담 중 효자전을 읽어 주셨다. 한 번은 어머니가 교리 문답 공부(천주교 교리 공부)를 잘 안한다고 꾸짖으셨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어느 효자전의 이야기 그대로 밖에 나가 내 손으로 매를 만들어 와서 어머니께 드리며 종아리를 드러내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때려 주십시오."라고 한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 그 매로 나를 때리지 않으시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시는 것으로 끝내셨다. 어머니는 이처럼 무척 엄했지만 직접 매를 드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늘 초가 삼간에서 살았고 대구서는 한때 셋방살이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 집 방은 언제나 깨끗이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군위 시골 동네에 살 때에도 그랬지만 그 무렵 그 동네에서 도배한 방은 무척 드물었다.
우리보다 형편이 몇 갑절 나은 집도 벽에 도배는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벽에 도배를 적어도 한 해에 두 번씩 하셨다. 그것은 봄, 가을 두 차례 시골 신자를 방문 오시는 신부님을 우리 집에서 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은 옷도 깨끗한 편이었다. 뿐더러 밥 또한 늘 잡곡이 약간 섞인 쌀밥이었다. 이것도 그 당시 시골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떡을 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처음 떡을 하신 것은 나의 큰 조카-어머니의 첫 친손자의 돌잔치 때였다. 어머니는 남들이 흔히 해 먹는 떡조차 하지 않으셨으나 일상 먹는 음식만은 그 당시 시골서는 보기 드문 좋은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 먹이셨을까 하고. 나는 후에 사람들로부터 부잣집 아들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들처럼 전혀 궁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 우리 집 환경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기적 같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궁해 보이지 않고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그 가난 속에서도 귀하게 키우신 때문이다. 어머니가 만들어 낸 기적은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사랑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을 그 후에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고난의 십자가도 기꺼이 짊어지셨던 삶을 통해 보여 주셨다.
(김수환추기경님의 강론 모음집에서)
(김수환추기경님)
어머니, 내 어머니
어느 날, 가을 들녘이 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갔다. 어느 수도원 손님 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제치고 창문을 여니 가을 하늘 아래 뜰 가득히 피어난 코스모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그 모습이 얼마나 청초하고 아름다운지 잃어버린 옛 고향 집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내가 어릴 때 그런 아름다운 뜰이 있는 집에 살아 본 일이 없건만 나의 마음의 고향, 어머니의 모습이 그 꽃밭에서 미소 짓는 것만 같았다.
우리 어머니는 코스모스처럼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신 데다가 젊었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수려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어머니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이 글을 쓰지만 어머니의 무엇을 어디서부터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신 분, 나를 있게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신 분, 나를 위해서는 열 번이면 열 번 다 목숨까지라도 바치셨을 분… 그런데 나는 아직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이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어머니는 가끔 다리에서 바람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의 뜻을 오랫동안 전혀 알지 못하다가 이제야 겨우 내 몸에서 느껴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의 무엇을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20여 년 전 독일에 있을 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ich)가 독일 국회에서 정초에 연설하는 것을 방송으로 들은 일이 있다. 그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독일, 독일,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독일… 이라는 우리 독일 국가의 뜻은 결코 객관적으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우리 독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요, 마치 우리 어머니가 객관적으로 평범한 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세상 제일 가는 어머니듯이 그렇게 우리 독일도 우리에게는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내게 있어서도 우리 조국 한국이 제일이고, 우리 어머니 서중화 여사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어머니시다. 서중화 여사(徐仲和女史). 여기 `여사'는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처음 붙여 보는 칭호이다. 가신 지 30년이 되어 가는 우리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그런 대접을 받아 보신 일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여사'라는 존칭을 붙여야 할 만큼 사회적 신분이나 학벌이 있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 지(地) 정도의 기초 한문과 한글 외에 아시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옹기 장사를 하신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신 후,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옹기나 포목을 이고 다니며 파는 생활을 거의 평생토록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말띠였는데 말띠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대로 그렇게 팔자가 드세다면 드셌다고 할 수 있는 한평생을 힘겹게 사신 분이시다. 내 마음에 새겨진 우리 어머니의 영상은 늙으신 모습이다. 70여 년의 온갖 풍상으로 주름진 그런 모습이다. 그러나 근엄하시면서도 미소를 지으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질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시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것 같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신 분… 차츰차츰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시고 초탈해지셨기 때문일까? 혹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드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 때문이었을까? 우리 어머니에게는 확실히 여장부의 기질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시대를 잘 만나고 공부를 하셨다면 사회적으로도 이바지하는 큰 그릇이 되실 소질을 갖춘 분이었다. 그런 자질과 도량을 어머니는 언제나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당신의 친 형제, 친척, 이웃들에게도 두루 영향을 미치신 것 같다. 옛날 대구 천주교 신자 사이에 잘 알려진 서 동정(徐童貞)이라 불리는 분이 있었는데 남자이면서 동정을 지키신 이 어른이 우리 외삼촌이셨고, 이분은 주위로부터 그 인품과 돈독한 신앙심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어머니에게는 큰 오빠이면서도 또한 십수 년 연하인 누이 동생인 우리 어머니를 늘 존경에 가까운 경애심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니는 국량(局量)이 크고 남다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자신을 감추고 오로지 자식들이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그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 중에 가장 오랜 것은 내가 세네 살 때 국화빵 기계에 빵을 굽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그 때 어머니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당시 우리는 경북 선산(善山)읍에 살았는데 읍내 공터에서 곡마단인가 신파극인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구경꾼들을 상대로 빵을 굽고 계셨다. 또 어느 날 머리 위에 무엇인가 이신 어머니 손을 잡고 밑에는 푸른 물이 흐르는 어느 긴 철교를 무서워하며 건넌 일이 떠오른다. 그것 역시 어머니의 장사 길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 살림은 그 때부터 아버지보다도 어머니가 꾸려 나가신 것 같다. 선산서 우리 집 가까이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고, 어느 날 그곳 아이들과 내 바로 위 형과 그 또래의 아이들이 싸우는 판에 나도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가 던진 돌이 내 이마에 맞아 상처를 입었는데 그 흉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다섯 살 때 우리는 선산서 군위로 이사했다. 큰 재를 하나 넘었고, 군위 용대동이라는 동네에 살 때에 나는 서쪽에 있는 그 산을 가끔 바라보았다. 특히 해질 무렵 그 산을 바라보곤 했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우리는 저 산을 넘어서 왔고, 지금 사는 이곳은 객지이며 저 산 너머 어디엔가 우리 고향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것 같다. 또 군위에서 살 때에는 우리 어머니와 나와 단 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가 있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옹기를 팔기 위해 먼 장에 갔다가,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면 어둑어둑해 가는 빈 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나 적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한길에 나가 어머니가 오실 신작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때 석양에 물든 그 산이 어린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산 너머 선산도 우리 고향은 아니었다. 우리는 도대체 정확히 어디가 고향이라고 하면 좋을지 모른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자라기는 선산과 군위에서 자랐고 내 위의 형들과 누이들도 대개 태어난 곳이 같지를 않다. 우리는 모두 8남매였는데 충남 합덕에서 시작하여 대구, 칠곡, 김천, 이렇게 태어난 곳이 다르다. 충남 연산(連山)이 고향이고 본관(本貫)이 광산(光山)인 내 할아버지 보현공(甫鉉公)은 독실한 신자로 병인교난(丙寅敎難, 1866-1868) 때 순교하셨고 아버지(永 )는 그분의 유복자였다. 그렇게 태어난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받던 많은 신도들이 그랬듯이 옹기 장수로 변신해 전전하다가 대구 처녀인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 뒤 옹기터를 경북으로 옮겼으나 장사가 잘되지 않아 이곳저곳으로 전전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친척도 아는 이도 전혀 없다. 그러니 어디를 가나 고향의 정감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도 경상도에, 그중에서도 대구에서 산 적이 시간적으로도 더 많으니 우리는 모두가 대구가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구는 우리 어머니의 고향이다.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로 순수한 대구 분이시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가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당시 군위로 이사해서 살 때에 형과 나는 그곳 초등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초등 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다. 우리 아버지는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충청도 억양으로 나를 부르셨고 그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그 흉내를 내던 것이 뚜렷이 기억나고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시고 바둑이나 장기로 소일하시다가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서울 동성(東星) 학교에 다닐 때 서울 서대문에 사시는 친척 고모님이 나를 보시자 우리 아버지 택호를 부르시면서 "너는 어쩌면 꼭 네 아버지를 닮았느냐?"고 하셨다. 그 때부터 나는 혹간 아버지 생각이 나면 스스로의 얼굴을 거울에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아주 적다. 그대신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시고 내가 성직(聖職)의 길로 가게 하신 분이시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 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司祭敍品)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 때 어머니는 깊은 감명을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부 5, 6학년)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다.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어서 자식들 교육에도 그만큼 엄격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고 그 때문에 내 위의 형과 나 우리 두 어린 형제를 더욱 엄하게 키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명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 우리는 어릴 때 거짓말은 물론이요, 욕같은 상스러운 소리를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다.
나에게 신앙을 심어 준 분은 물론 어머니시다. 게다가 형이 신학교로 간 후에 어머니와 나 둘이서 살았다. 큰 형들은 돈벌이를 한다고 집을 나가 살았다. 그 때 어머니는 매일 저녁 한참씩 긴 기도를 하셨고 나는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졸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 기도를 바쳐야 했다. 그러시고도 자기 전에는 다시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나 혹은 우리나라의 고담 중 효자전을 읽어 주셨다. 한 번은 어머니가 교리 문답 공부(천주교 교리 공부)를 잘 안한다고 꾸짖으셨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어느 효자전의 이야기 그대로 밖에 나가 내 손으로 매를 만들어 와서 어머니께 드리며 종아리를 드러내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때려 주십시오."라고 한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물론 그 매로 나를 때리지 않으시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시는 것으로 끝내셨다. 어머니는 이처럼 무척 엄했지만 직접 매를 드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했다. 늘 초가 삼간에서 살았고 대구서는 한때 셋방살이도 했었다. 그런데 우리 집 방은 언제나 깨끗이 도배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군위 시골 동네에 살 때에도 그랬지만 그 무렵 그 동네에서 도배한 방은 무척 드물었다.
우리보다 형편이 몇 갑절 나은 집도 벽에 도배는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벽에 도배를 적어도 한 해에 두 번씩 하셨다. 그것은 봄, 가을 두 차례 시골 신자를 방문 오시는 신부님을 우리 집에서 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은 옷도 깨끗한 편이었다. 뿐더러 밥 또한 늘 잡곡이 약간 섞인 쌀밥이었다. 이것도 그 당시 시골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떡을 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처음 떡을 하신 것은 나의 큰 조카-어머니의 첫 친손자의 돌잔치 때였다. 어머니는 남들이 흔히 해 먹는 떡조차 하지 않으셨으나 일상 먹는 음식만은 그 당시 시골서는 보기 드문 좋은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 먹이셨을까 하고. 나는 후에 사람들로부터 부잣집 아들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란 부잣집 아들처럼 전혀 궁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 우리 집 환경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기적 같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궁해 보이지 않고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그 가난 속에서도 귀하게 키우신 때문이다. 어머니가 만들어 낸 기적은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사랑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을 그 후에도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고난의 십자가도 기꺼이 짊어지셨던 삶을 통해 보여 주셨다.
(김수환추기경님의 강론 모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