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을 축하합니다. 아이들이 그린 부활달걀도 참 예쁘네요.”
“양업고 들어가 매주 집에 올 때마다 활기가 생겨오는 아이를 보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행복한 파스카절 보내세요”
눈앞 새롭게 변화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에 감동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공감하다가 부활절, 파스카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파스카 pascha’는 우리말로는 ‘지나가다, 건너가다’의 의미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란 성경 말씀처럼 땅에 뿌려진 씨앗도 죽음을 지나야만 많은 열매를 맺고 부활의 풍요를 누린다. 어떻게 보면 겨울을 지나 봄을 맞고 여름을 건너서 가을을 맞는 대자연의 도래 과정이 파스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루의 밤과 낮도 파스카 신비를 상징한다.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묻히는 것에 비기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에 비긴다면 밤은 죽음이요 낮은 생명을 상징하지 않는가. 하루하루가 바로 ‘건너감의 시간’, 즉 파스카의 시간이다.
사람의 일생도 파스카의 여정이라면 비약이 될까? 사람은 출생할 때 어둠 속에서 밝은 데로 나온다. 뒤이어 유년 시절, 청년기가 되고 뒤이어 장년기로 접어든다. 하루해가 가면 어김없이 밤이 오듯, 인생도 저물 때가 오며 마침내는 묻히고 만다.
그러나 다가오는 실재도 있다. 밤이 가고 아침이 되고 우리가 잠에서 일어나듯이, 인생의 마지막 밤인 죽음 다음에는 부활도 다가오리라. 사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것이 더 힘들다. 죽음만이 남고 죽음만이 마지막 결론이 된다고 볼 때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허무이다.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 선하게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 정의롭게 살아 보려는 것, 사랑을 베풀면 살아 보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일 죽음이 마지막 답이 되고 만다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고, 부조리이고 모순이다.
파스카의 길이라면 그래서 먼저는 치유의 길이 되겠다. 치유란 우리의 상처를 돌보고 인생사의 억압과 괴로움을 어루만져 준다. 실로 어떤 이는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있다. 그러나 지난날의 갈등과 상처들, 그리고 그대를 비참하게 만든 좌절이야말로 현재까지 당신을 괴롭히는 실체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그대 안에서 죽은 것들을 모두 적어 보라. 그것들을 정원이나 화분에 묻어 버리라. 그리고 그 위에 꽃씨를 뿌려라. 과거라는 무덤 위에 꽃도 새로 피고 나비도 찾아 들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스카의 길은 더 큰 활기와 자유와 기쁨으로 들어가는 사람됨의 길이다. 진정한 인간 됨의 길이다.
“때때로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 그리고 영리하고 강한 자만이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차갑고 냉혹한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데 지칠 수 있고, 어떤 때는 악의 힘 앞에 무력감을 느끼고 낙담할 수도 있다. 사회에 만연한 계산과 무관심의 태도, 암적인 부정부패, 불의의 확산, 냉혹한 전쟁 등도 낙담의 원인이다. …하지만 부활절은 우리가 패배감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희망을 가둬놓은 무덤의 돌을 굴리게 동기를 부여한다. 부활절의 힘은 실망과 불신의 모든 돌을 굴려버리라고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다”-프란치스코 교황의 부활 강론-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이다. 이는 부단한 탈출의 삶이다. 물도 웅덩이에 고이면 썩듯이 삶도 안주로 고이면 썩는다. 살아 흐르는 강처럼 부단히, 끊임없이 맑게 새롭게 흘러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 할 수 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는 영적 탄력성 좋은 삶이 바로 파스카의 삶이다. 나날의 파스카에서 해 마다의 파스카로, 그리고 일생의 파스카로 우리 삶의 노정을 더듬어 나가야 한다.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