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까?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177 | 작성일 : 2024년 7월 13일
왜 그럴까?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새,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이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서 살고 있지않는가?’”(마르 6,2-4)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고향 사람들은 먼저 놀라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왜 그럴까? 고향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지 못하는 걸까? 함께 잔치를 베풀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할 가까운 이웃들이 대체 왜 더 무시하고 배척하는 걸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 때문일 것이다. 편견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불신을 낳는다. 고향의 지인들은 그분의
출신과 내력을 잘 알기에 그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저 사람은 분명히 목수이고, 마리아의 아들임을 우리 동네에 일가친척들이 다 있는 것을 아는데 말이야.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확신 너머의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과거 때문에 현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예수라는 인물의 중대성이다. 현재 나자렛 예수는 탁월한 하느님 말씀의 해설자요, 하느님 힘을 드러내시는 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악령이 복종할 정도로 권위 있으시고, 바람과 호수, 자연이 복종할 정도로 권위 있는 분이시다. 병든 자를 치유해 주시는 분, 심지어 죽음의 세력까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소생시킨 분이시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이토록 중대한데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하, 그렇다면 오늘 고향 사람들의 오류가 그들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가끔은 나 역시 그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 때문에, 그들과의 유쾌하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서, 은연중에 무시하고 배척하지 않았던가.
주변 사람들을 이런저런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두고, 그들이 변화되고 성장했음에도, 그들을 인정해 주거나 믿어주지 못했던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나의 확증편향은 내 생각과 일치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그 반대의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내 의견에 맞게 왜곡하지 않았던가.
주님, 당신의 고향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스스로 정해 놓은 고정 관념들에서 벗어나
주님을 늘 새롭게 만나는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