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징표 읽기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61 | 작성일 : 2024년 10월 26일
시대의 징표 읽기
새벽이다.
늘 하던 대로 십자 성호를 긋고 복음을 읽는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그 끝으로 침대 머리맡에 놓아 든 박노해 님의 책 `걷는 독서'의 한 구절도 눈에 들어온다. `가을은 익어가는 계절, 쭉정이와 알갱이를 가려내는 엄정한 생의 계절'이란 글귀에는 정신이 번쩍 났다.
이 시대, 그리고 이 가을,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삶이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알갱이 없는 쭉정이로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가을, 이 새벽부터 한국 민주화 시대에 정신적 어른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을 해주시며 읽으라 하셨는데, 그 책이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인지라 그렇지 않을까.
“난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정치의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아섰다.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과연 이 시대의 징표가 무엇일까? 작금의 우리나라는 정치적 퇴행과 무질서한 탐욕의 가치관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법의 잣대가 정의롭지 못한 거짓과 가짜가 판치는 시대이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김 추기경이 살아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어느 날, 김 추기경께서는 식사하고 있던 신부들에게 `당신은 두 개의 언어를 잘하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맞히어 보라'고 하신다.
누군가가 “추기경님께서는 독일에서 유학하셨으니 독일어를 잘하실 것이고, 일제강점기를 사셨으니 일본어를 잘하실 것 같다.”라고 했더니 추기경님께서는 “아니다.”라고 한다.
스무고개를 하듯 여러 나라 언어를 열거했는데도 “전부 틀렸다”고 말씀하신다. 그 신부가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도대체 잘하시는 말이 무엇이냐”고 여쭙자 추기경님은 웃으시면서 “나는 두 가지 말을 잘하는데 하나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참말'이야”라고 대답하신다. 자신이 성직자이지만 거짓말을 하는 인간적인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신다.
가을빛이 가득한 양업고등학교의 아름다운 교정에 이제 막 아침이 밝아 오려고 한다. 나는 식전 댓바람부터 운동장에 나와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막 동이 터오려는 동쪽 하늘을 향해 가지런히 두 손도 모으게 된다.
“하느님, 이 가을에 외국어가 아니라 겸허한 모국어로 기도합니다. 참말보다는 거짓말이 판치는 이 시대, 쭉정이는 불태우시고 알갱이는 모아들이소서. 그리하여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알갱이 가득 찬 곡식단 들고 기쁨의 춤을 추게 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