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에 나무들이 일제히 낯을 씻고 환호하는 6월/ … /내가 빨갛게 목 타는 장미가 되고 끝없는 산 향기에 흠뻑 취하는 뻐꾸기가 된다.”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 푸른 담쟁이로 덮인 양업고 교정을 거닐면 이해인 수녀님의 6월의 시 한 구절이 절로 읊어진다.
“교장 신부님, 우울해요. 저 좀 위로해 주세요.” “왜 우울한데?”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응, 너는 말이야, 온 우주를 주어도 바꿀 수 없고, 수억 조에도 살 수 없지. 인류 역사에 수억 명이 태어나 죽었고, 지금 79억이 있는데, 그중 너와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 똑같은 DNA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어. 너는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유일무이하게 보내 준 소중한 선물이야.”
쉬는 시간 교장실에 놀러 와 비타민 젤리를 얻어가는 친구와의 대화이다. 그런데 위로라기보다 교장 훈화에 가깝게 되어버렸다.
사전에 `위로'라는 뜻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친구나 게임, 종교적 행위 등을 통해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성 없이 대충하는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라틴어로 `위로'는 `콘솔라치오( consolatio)'라고 한다. 혼자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기의 고통과 상실, 곤궁으로 홀로 남겨진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괴로움이 그의 입과 마음을 닫아버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로 한 발짝 들어섬을 의미한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집을 찾아갈 용기, 헤아릴 수 없는 괴로움과 고독만 기다리고 있는 어떤 상가(喪家)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의 고통 안에 머무는 것까지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저 어딘가에서 읽었던 경건한 말들이나 열거하며 표면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신 신경학과 애덤 캐플린(Adam Caplen) 박사가 소개한 우울한 상태의 사람에게 건네서는 안 될 여섯 가지 말이 있다. “힘내!”, “네가 감정을 잘 다스려야지.”, “가족을 생각해!”, “네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네 심정 알아.”, “너 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어”라고 한다.
평소 필자 역시 자주 했던 말들이라 뜨끔하다. 지금 이 시대도 위로가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무 위로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요한이 나타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하고 말한다.”(마태 11,15-19).
위로의 첫걸음이란 일단 공감해주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당시 바리사이들은`고리대금업자, 양치기, 세관원, 세금 징수원, 땜장이, 직조업자, 이발사, 목욕탕 관리인, 제혁공, 의사, 선원, 마부, 낙타 몰이꾼, 도축업자(Grundmann)'의 직업목록을 만들어 놓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작금 우리 시대에도 위로는 여전히 긴요하다. 내가 먼저 위로받기보다 위로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