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무엇이 보이는가?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612 | 작성일 : 2023년 2월 19일

   봄, 무엇이 보이는가?

   겨울 무채색에서 돋아나는 이 봄이야말로 사철 가운데 볼 것이 가장 많아서 그럴까? 이 ‘봄’이 눈으로 ‘본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라는 학설도 있다. 

   보는 것은 오관 중 정말 중요하다. 본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어느 봄날, 많은 사람이 붐비는 장터에 나타난 한 도둑놈이 돈을 훔치기 위해 기회를 노리며 돈 많은 곳을 찾아다닌다. 마침내 돈뭉치 하나를 집어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환한 대낮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짓을 하였기에 몇 발짝 가지 못해 붙잡히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많은 사람은 어이없는 광경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어리석은 도둑놈아! 도둑질하려면 남이 보지 못하게 해야지 그 많은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바보 같구나,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을 못 보았더냐?”하고 물었다. 도둑님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중국 사상가 열자의 이야기이다. 

   확실히 돈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혈연, 학연, 지연의 오만과 편견으로 봄으로써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지 못하지는 않는가. 당리당략에만 눈이 어두워 타당에 속한 사람들의 잘못은 크게 보면서도, 같은 당의 잘못은 축소하진 않는가. 설사 부모라 하더라도 자기밖에 모른다면 불쌍한 부모이다. 자녀의 올바른 장래가 보여야 한다. 정치가의 눈에 권력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썩은 정치가다. 백성들이 보여야 한다. 스승의 눈에 봉급이나 직위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해로운 사람이다. 제자가 보여야 한다. 학생의 눈에 당치 않은 것만 보인다면 차라리 배움을 그만두는 것이 낫다. 우선 이상(理想)이 보여야 한다. 

   무엇이 보이는가? 작금의 세상은 올바른 것을 보고 올바른 것에 맛 들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의 성찰이 각별하게 필요하다. 성찰(省察)은 성(省)자가 보여 주듯이 젊은(少) 눈(目)이다. 때 묻지 않은 눈이며, 먼 곳에 착목(着目)하는 눈이다. 세상을 보는 맑은 눈이 필요한 봄의 시작이다. 

   이 봄에 걸맞게 민태원 님의 “청춘예찬”과 사무엘 울만의 “청춘”을 떠올려 본다.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生命)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의 문제가 아니며 의지의 문제,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구치는 신선함이다.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경이에 대한 이끌림, 어린아이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기쁨이 있다. 당신과 나의 가슴 속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무선국이 자리한다. 신과 인간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당신은 언제나 청춘이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새봄이 시작되었다. 소생하는 이 계절의 관점에 걸맞게 보고 살아야 소위 ‘철들어라’라는 말대로 살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