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505 | 작성일 : 2023년 7월 10일
흙
작은 동막골, 옥산면 환희길에 있는 양업고의 옛 지명이다. 푸른 담쟁이가 덮인 교정에는 더위 속에 갖가지 여름꽃들이 한창이다. 사랑이라는 꽃말의 자귀 꽃,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의 백도라지와 자색 도라지꽃, 순결과 신성함을 뜻하는 원추리꽃, 단순·편안·풍요·다산을 뜻하며 손님을 맞는다는 접시꽃, 조용한 기다림과 침착함을 드러내는 옥잠화가 가득하다. 그런데 나는 하마터면 놓칠 뻔하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무수한 식물들과 고운 꽃 밑에는 흙, 흙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온갖 뿌리들을 감싸고 있었다. 칭찬 한마디를 듣지 못하면서도 흙은 그렇게 지켜주고 키워주고 있었다.
흙은 대지에 새 생명을 낳아주고 먹여주고 키워주며 가르치는 대자연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흙은 늘 거기에 있고, 그래서 항상 그러려니 하고 생각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 위를 밟아대고 모두가 쓰레기까지 내다 버린다. 흙은 묵묵히 받아들여 모든 쓰레기를 부패시킨다. 부패를 생명의 자양분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으로 바꿔준다. 햇빛과 비까지 받아들이면서 흙은 씨앗의 `30배나 60배나 100배'의 수확을 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흙의 힘과 자유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할 데 없이 자유로운 사람이셨다. 어떠한 사람이나 사물에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우셨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바라지 않았기에 명예욕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금전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 노예가 되는 일도 없었다. 살 집을 갖지도 않았으니 거처에 의지하지도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또 어떤 신분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전혀 의지하지 않았기에 더욱 자유로우셨다. 바리사이파들은 율법을 자기에게 `평안을 주는 베개'라고 불렀지만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베개도 필요 없었다. 무사무욕(無私無慾)의 삶 자체가 평안함의 베개요 자유였다.
그분은 오직 하나에만 뿌리를 두셨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하늘의 거룩한 뜻'이 바로 그분의 `음식물'이자 뿌리를 내린 자리였다. 그러하기에 예수의 자유는 임의적인 것, 또는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있었기 때문에`다른 이를 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자유는 봉사가 될 수 있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흙과 같은 분이 될 수 있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가장 위대한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졌을 때도 예수께서는 흙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백성의 은인으로 자처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당신들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루카 22, 25-26)
이런 말씀에 따르면 권력은 재력(財力)이나 무력(武力)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권력은 헌신적인 봉사로 실증되어야 한다. 작금에 필요한 것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철저하게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지도자상이다.
`선(善)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시끄러운 것은 선(善)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이탈리아속담이 있다.
더위 속, 교정에 피어난 꽃들을 보다가 그 밑에 있는 흙을 더 오래 보게 된다. 저 흙을 보며 참으로 자유로운 자, 참으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위정자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