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 없소?
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는 사람, 개보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 사자보다 힘이 약한 사람, 소나무처럼 늘 푸르지 못한 사람, 그런데 왜 사람이 말, 개, 사자, 소나무 보다 위대하다 하는가? 누가 사람인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말한다. “짐승들은 그들의 충족 될 때 만족한다. 사람은 만족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만족시킬 수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필요한 것을 소유할 뿐 아니라 스스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필요한 존재인가?”
올 한 해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기반성을 해봐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까운 곳에 일어난 지진, AI 조류 독감으로 수천만 마리의 닭과 오리의 살처분, 독감의 유행, 그리고 역사의 큰 오점인 대통령의 탄핵 등등 엄청난 충격을 주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해졌다. 무덤덤해졌다. 그래서인지 한 개인이고, 한 가정이고, 한 나라이고, 자기반성을 할 줄 모른다.
초·중·고등학생들의 교육도 혁신학교, 행복학교, 대안학교 등등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근본 뿌리부터 바뀌는 교육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들 ‘공부한다’하면 시험 준비를 한다는 것, 무슨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안다. 사실 ‘공부한다’는 것은 ‘몸을 닦는다(修身)’거나 마음을 잡는 일 또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求道)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하긴 이런 식의 공부가 아쉽기 짝없는 시절에 우리는 살고 있다. 먹고 입고 돈 쓰는 일에 비하여, 묵상하고 반성하고 전망하는 일을 너무나도 등한시하며, 판단과 결단을 SNS상 정보와 소비주의 문화, 자본에 맡기고, 여론에 맡기고 있는 형편이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참으로 오늘날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의 죽음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이다. 터무니없는 테러와 전쟁, 속임수와 폭력으로 사람이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나아가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남은 자들까지 압살을 하는 마당이다.
이런 시대에 “구원의 빛 살”은 어디에서 어떻게 비쳐오는 것인가? 암흑 세상에 빛이 왔지만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한다.
천만 사람이 그르다 해도 옳은 것은 끝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온 세계 인구가 압도적 다수결로 하느님이 없다 해도 하느님은 살아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돈, 돈하며 돌고 돌아 마침내 미쳐간다 해도 홀로 초연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사람이 자기만 아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있어도 자기 몸과 마음을 이웃을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거기 사람 냄새나는 그런 사람, 거기 누구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