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누가 부활하셨나요? 누가 파스카 자체가 되셨나요? 저인가요 여러분인가요?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파스카이십니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습니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러 내 줄까요?“ 서로 걱정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앞에 있던 매우 큰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감짝 놀랐습니다. 예수님 빈무덤에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그가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 5ㄴ-7 참조)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찢겨지고 부서지고 으스러진 바로 그 생명이 다시 깨어나고, 새롭게 심장이 뛰기 시작 했습니다. 이 파스카의 밤, 부활하신 분의 심장이 뛰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은총이며 희망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무덤의 큰 돌을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큰 돌’은 우리의 삶을 비관 안에 갇히게 했던 것들, 우리 삶을 계산된 개념적 방식들 안에 갇히게 했던 것들, 안주하고 안전한 우리들 삶의 강박적 추구에 갇히게 했던 것들,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을 가지고 놀게 하는 끝없는 야망 안에 갇히게 했던 모든 것들입니다. 주님은 부활로서 이 모든 장애물을 치워 버리십니다. 바로 이 파스카의 밤은 부활하신 분의 심장이 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되살아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활의 삶을 죽음 다음에 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 다음에 이루어지는 이야기로 한정시켜버립니다. 그러나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아닙니다. 부활 이야기는 단순히 예수님 믿다가 죽은 사람은 이다음에 부활해서 천당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극복해내기 위한 종교적인 장치 혹은 해답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부활신앙은 허무를 달래기 위한 진정제나, 신경 안정제도 아닙니다.
부활은 예수님 전 생애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이라는 그 말씀과 같이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상에 죽은 예수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선포와 행동들, 바로 예수님의 삶 전체가 궁극적으로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피맺힌 절규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이 대답이 바로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다.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 숨겨진 채 현존하시는 분, 극도의 위협, 무의미, 허무함, 버림받음,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서도 우리 인간을 지탱하고 붙잡아 주시는 분, 인간의 곁에서 항상 인간과 함께 아파하시는 분, 함께 고통당하는 하느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되시는 하느님, 바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을 완전히 계시하셨습니다.
사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우리도 ‘지금’, ‘죽기 전’에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누리는 자리가 부활의 자리가 아니라, 살아서 제대로 생명을 만끽하는 자리, « 지금 여기 »가 부활의 자리인 것입니다.
오늘 부활성야 복음은 우리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부활하는 길, 부활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그 길은 갈릴래아로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무척 더러운 곳, 이방의 나라와 살을 섞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곳, 늘 침공과 박해의 교두보가 되는 이방인들의 지역이라고 멸시받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래아는 무식한, 그래서 하느님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의 땅, 캄캄한 어둠의 땅, 그늘진 한의 땅으로 몰아세웠던 곳입니다. 그곳은 가난해서 눈물의 땅이요, 서러워서 한의 땅이었습니다. 죄가 많아 소외되고 잊혀져 버린 땅이 바로 갈릴래아였습니다. 모두가 포기했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죽어지내던 그런 어둠의 땅이 갈릴래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거기, 갈릴래아에서 구원의 첫 삽을 뜨셨습니다. 몸소 갈릴래아 사람으로 불리길 원하시며 그 바닥 제일 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증언대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께서 베푸셨던 33가지의 기적 중에 24번이 바로 이 갈릴래아에서 이루어졌습니다.다. 열두 제자 중 단 한 사람,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만 가리옷 사람이었고, 나머지 열한 명이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만큼이나 갈릴래아를, 그리고 갈릴래아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갈릴래아는 우리가 사는 세상 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가치에 대한 무감각이 가득한 거기가 바로 갈릴래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곳, 가장 우선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갈릴래아이며, 바로 거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가운데서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희망을 비추어 주는 일을 하고, 이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함으로서 부활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이루어지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날 수 있고,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며, 나의 사건, 너의 사건, 우리들 모두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 지금 여기 »가 우리가 부활해야 할 장소입니다.
“학교가 좋냐?” “예 좋아요” “무엇이 좋냐?” “다른 학교에 다녔을 때는 늘 같은 것을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 공부가 너무 지루했어요. 저는 이곳에 와서 완전히 변했어요.”
처음 만나 쓸 때, 자기 눈빛을 바로 두지 못하고, 무척 불안감에 떨고 있던 우울한 아이의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용기가 없어 속으로 기어 들어가듯 말을 하던 소극적인 아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즐겁게 뛰어 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습니다. 양업고에 우리 아이가 온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를 양업고가 살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양업고의 교장 신부님과 선생님들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합니다.”
입학 했을 때, 소위 말하면 껄렁껄렁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를 하며, 미래의 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아이, 학교의 모든 사건사고에는 빠지고 않고 있었던 아이의 아버지가 하신 고백입니다.
부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부활은 변화입니다. 부활은 자기 과거로부터의 변화입니다. 부활은 내 과거의 상처와 아픔의 한가운데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며, 나의 감정과 불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리고 나의 슬픔과 자기연민에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어둠을 빛으로, 불안을 신뢰로, 무덤을 천사의 장소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진정 부활은 하느님께서 나를 철두철미하게 새롭게 만드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그분께서 나의 과거를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양업고는 하느님 사랑의 학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하는 ‘알렐루야!“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지는 학교입니다. 저는 믿고 기도합니다. 십자가 죽음에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이 우리 아이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시고, 나비처럼 날아 아름다운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아이들로 변화 시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큰 돌로 가로 막혀 있는 예수님의 빈무덤으로 달려가 이들이 보았던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젊은이가 저에게 말합니다.
“놀라자 마라. 그분께서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너는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다.” 그렇습니다. 양업학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저의 갈릴래아 입니다. 우리 아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