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업학교의 주보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작성자 : 장홍훈 | 조회수 : 3,923 | 작성일 : 2013년 4월 20일

양업학교의 주보이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우리나라 최초로 선발된 신학생이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신부는 1821년 충청도 청양에서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치명자 이성례 마리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순교신앙을 물려받았다. 16세의 홍안으로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한 그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2월 말까지 요동차쿠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까지 12년간을 중국에서 수학하며 가르쳤고, 조선에 귀국해서도 역시 12년간을 박해시대의 유일한 내국인 사제로서 한강이남 전 지역을 담당 사목하였다.

    야반도주 피난하여 참혹한 궁핍과 지속되는 핍박 중에 목마르게 성사(聖事)만을 기다리는 교우들이 눈에 밟히고 ‘가슴이 미어져’ 수개월 동안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밤에는 성사집행 낮에는 도보로 매년 127개 공소 길 7천리를 돌아다니다가, 40세의 나이로 길 위에서 쓰러졌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코 12,30)’ 하느님의 사랑을 사목하다가 노상 과로사한 것이다. 피를 흘리는 치명이 빨간 순교라면 최양업신부는 마지막 생명수 한 방울까지 다한 백색 순교였다. 현대사회의 신앙의 적수는 일상생활 안에 보이지 않게 도사리기에 더 가공할만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신앙에 더욱 긴요해 지는 분이 ‘일상생활의 수호자 최양업’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이름 양良자는 물론 ‘어질고 선하고 좋은 일(業)’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양 良자가 ‘기를 양養’자로 여겨질 만큼 그의 자질과 성품, 온 생애가 교육자적이었다. 먼저 최양업은 조선 최초로 당시 서양의 선진과학과 문화문물을 수학한 유학생이요 몇 개의 외국어에 능통한 수재였다. 156개의 단어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라틴어 작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완전한 라틴어실력이었다.’  이후 이 능력은 중국 북만주 소팔가자 신학교에서 교사로서 4년 동안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더욱 배가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무엇보다 끝까지 기다려 줄 줄 아는 ‘희망’의 지도자였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misericordiarum pater) 하느님 관’에서 기인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결국은 우리를 한없이 좋게 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영원히 희망할 수(semper in aeternum sperabo 참조) 있는 것이다. 그의 ‘온유’한 지도자 상 역시 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믿음에서 기인한다. 만사를 하느님 자비의 섭리에 온전히 맡길 수 있으니 최악의 상황에서도조차 ‘온유한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최양업신부는 ‘눈높이’ 지도자였다. 점점 깊은 산속 생활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신자들을 위해 한문 천주교교리를 쉬운 한글 노래가사로 바꾸어 가르친 바, 화전 밭고랑을 일구면서도 진리를 노래하게 했다. 그 밖의 덕행으로 ‘지극히 겸손’했고 공동체 안에서의 친교와 특별히 더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에 대한 애정은 동료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게 만들었다. 


하느님의 사람,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를 양업 학교의 주보로 모신 것은 그 분의 확고한 신앙관과 교육사적으로 큰 의미를 이 학교에 담아 좋은 학교(Quality School)를 통하여 교육의 본질에 합당한 良業(Quality Work) 양업(養業)으로 양업(良業)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이 게시물은 양업고님에 의해 2015-03-10 17:31:47 환희길 이야기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