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미보이 마마걸을 거부한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781 | 작성일 : 2012년 1월 25일
마미보이, 마마걸을 거부한다.
“애야 산에 가자!”, “산에는 왜 오릅니까?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 것을”, “공부해라!”, “공부는 왜 합니까? 써먹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이는 한 아버지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 아들 사이의 대화였다.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향한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 온 아들이 “아버지, 저 네팔 또 가고 싶은데요. 저 공부해야겠어요.” 라고 말했다며, 아버지는 나에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챌린저 탐험’을 하고 돌아온 아들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서서히 그 학생은 자신이 체험한 학습동력을 갖고 자발성을 갖고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하게 될 것이다. 하루에 6-7시간을 걷고 걸으며 일주일을 보낸 트래킹 체험은, 책 속에서 이론으로 익혀 온 추상적인 앎이, 현장에서 실체 몸으로 부딪히며 만들어낸 앎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시동을 걸고 밤늦게 돌아오는 자기 운전대를 선생님과 부모님에 빼앗기며 이래라 저래라 간섭 받으며 통제된 생활을 하는 학생들, 그들은 언제나 학교에서 교실이란 좁은 공간에 박혀 이론을 배운다. 그 이론은 삶이 없는 추상적 이론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그 수준이다.
나는 대치동 학부모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학부모는 “저희 아이가 초, 중학교에서 전체회장을 했어요. 강남 학부모들 정보가 참 빠르지요. 저쪽 초, 중학교 전체 학생회장인 부모가 이쪽의 정보를 다 갖고 있습니다. ‘내 아들을 고등학교에서도 회장으로 키워야 하는데.’ 하면서 서로 정보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양업에, 그것도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니 한 시름 놓으며 요즘은 정보 대상에서 벗어나 말 상대도 안 해주고 동물원에 동물 구경하듯 대합니다.” 라면서, 양업에 온 자녀를 바라보며 강남의 다른 자녀들의 움직임을 보며 갈등된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방학에 계속 잠만 자요.” 그 말 속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이에 학생인 아들이 말을 받는다. “양업에 대해 일부 학생들은 별로라고 하지만, 저에게는 1년을 지나고 보니 마음에 쏙 드는 학교입니다. 저도 친구들을 보면 쳐지지는 않나하며 걱정도 하지만, 그 서울 친구들은 맹목적입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저는 꼭 제 진로를 찾고 목표를 갖고 생활할겁니다.”
나는 학생의 말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분명 양업의 학생이 다른 점은 ‘자기 주도적 학습’의 의미가 유별나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은 스스로가 발견해낸 목표, 과정, 방법, 평가 등 일련의 내용들이 자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강남식 자기 주도적 학습의 목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명문대합격이 공부의 필요성이다. 공부할 내용은 오로지 국, 영, 수이고, 평가는 이들 과목을 1등급으로 올리는 내신과 수능성적이며, 이를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 내가 인생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이들이 외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자율성과 자기주도성과는 거리가 먼, 마미보이 마마걸을 만들고 있다.
우리 양업인들은 변화를 시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주도적 학습자인 셈이다. 캐나다에서 수학하는 안나 학생, 축구 해설가가 되겠다는 루비아 학생, 미국 휴스턴 CIA요리학교를 다니며 국제적으로 알려진 요리사가 되겠다는 미진 학생, 사진학을 전공해 국제적인 사진작가를 꿈꾸는 민석 학생, 철학을 공부해 삶의 철학가를 꿈꾸는 지혜 학생…. 이들이야말로 자기주도적인 학습자가 아닐까. 왜냐면 자기 운전대를 자기가 잡고 자기 미래의 꿈을 이루어가니까.
“애야 산에 가자!”, “산에는 왜 오릅니까? 올라갔다 다시 내려올 것을”, “공부해라!”, “공부는 왜 합니까? 써먹을 곳도 마땅치 않은데.” 이는 한 아버지와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인 아들 사이의 대화였다.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향한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 온 아들이 “아버지, 저 네팔 또 가고 싶은데요. 저 공부해야겠어요.” 라고 말했다며, 아버지는 나에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챌린저 탐험’을 하고 돌아온 아들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서서히 그 학생은 자신이 체험한 학습동력을 갖고 자발성을 갖고 자기주도적인 학습을 하게 될 것이다. 하루에 6-7시간을 걷고 걸으며 일주일을 보낸 트래킹 체험은, 책 속에서 이론으로 익혀 온 추상적인 앎이, 현장에서 실체 몸으로 부딪히며 만들어낸 앎이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시동을 걸고 밤늦게 돌아오는 자기 운전대를 선생님과 부모님에 빼앗기며 이래라 저래라 간섭 받으며 통제된 생활을 하는 학생들, 그들은 언제나 학교에서 교실이란 좁은 공간에 박혀 이론을 배운다. 그 이론은 삶이 없는 추상적 이론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그 수준이다.
나는 대치동 학부모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학부모는 “저희 아이가 초, 중학교에서 전체회장을 했어요. 강남 학부모들 정보가 참 빠르지요. 저쪽 초, 중학교 전체 학생회장인 부모가 이쪽의 정보를 다 갖고 있습니다. ‘내 아들을 고등학교에서도 회장으로 키워야 하는데.’ 하면서 서로 정보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양업에, 그것도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니 한 시름 놓으며 요즘은 정보 대상에서 벗어나 말 상대도 안 해주고 동물원에 동물 구경하듯 대합니다.” 라면서, 양업에 온 자녀를 바라보며 강남의 다른 자녀들의 움직임을 보며 갈등된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방학에 계속 잠만 자요.” 그 말 속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쳐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이에 학생인 아들이 말을 받는다. “양업에 대해 일부 학생들은 별로라고 하지만, 저에게는 1년을 지나고 보니 마음에 쏙 드는 학교입니다. 저도 친구들을 보면 쳐지지는 않나하며 걱정도 하지만, 그 서울 친구들은 맹목적입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한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저는 꼭 제 진로를 찾고 목표를 갖고 생활할겁니다.”
나는 학생의 말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분명 양업의 학생이 다른 점은 ‘자기 주도적 학습’의 의미가 유별나다는 것이다. 우리 학생은 스스로가 발견해낸 목표, 과정, 방법, 평가 등 일련의 내용들이 자율적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강남식 자기 주도적 학습의 목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명문대합격이 공부의 필요성이다. 공부할 내용은 오로지 국, 영, 수이고, 평가는 이들 과목을 1등급으로 올리는 내신과 수능성적이며, 이를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 내가 인생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이들이 외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자율성과 자기주도성과는 거리가 먼, 마미보이 마마걸을 만들고 있다.
우리 양업인들은 변화를 시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주도적 학습자인 셈이다. 캐나다에서 수학하는 안나 학생, 축구 해설가가 되겠다는 루비아 학생, 미국 휴스턴 CIA요리학교를 다니며 국제적으로 알려진 요리사가 되겠다는 미진 학생, 사진학을 전공해 국제적인 사진작가를 꿈꾸는 민석 학생, 철학을 공부해 삶의 철학가를 꿈꾸는 지혜 학생…. 이들이야말로 자기주도적인 학습자가 아닐까. 왜냐면 자기 운전대를 자기가 잡고 자기 미래의 꿈을 이루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