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한다는 것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14 | 작성일 : 2011년 10월 2일
용서한다는 것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마태 18,22) 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행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상에 매단 사람까지 용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시며 용서하셨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도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며 예수님의 완전한 용서를 몸소 실천했다. 인간 내면에 어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집회27.30)고 하시며, 이런 분노와 진노의 앙금까지 내 몸 밖으로 완전히 없애는 것이 진정한 용서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용서한다고 하며 어디 그런가. 앙금이 언제나 남아 있는 상태다. 그래서 용서란 것이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 안에서 매일 의지적으로 점검하고 노력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다.
요즘 극단적인 사람들은 미워해야할 대상도 아닌데도 혐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극단주의 청년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세)에 의해 자행된 테러 총기 난사 사건이 그 한 예이다. 복지국가 노르웨이는 어느 나라보다 행복하다. 그런데 석유관련 고된 직종에 일할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용정책으로 많은 이국인이 이민을 오고, 전체 인구인 450만 명중 외국인 근로자가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민고용정책으로 불거진 청년실업, 빈곤, 경제침체에 따른 잿빛 미래 등이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이럴 즈음 극우파들은 이런 이민정책으로 생겨나는 다문화 사회는 극우의 반동으로 미워하고, 그들 종교인 무슬림까지 혐오한다. 이런 상황 하에 기독교 극단주의자의 소행은 어쩌면 계획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테러범은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 , 극우파들은 그의 행위를 옹호하고 나섰다. 일본 역시 지진과 쓰나미 이후, 원전사고의 바른 처방법 보다 이참에 핵으로 무장하자는 극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성하지 않는 미개한 일본의 생각이 그렇다 치자. 유럽은 뿌리 깊은 기독교 문화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사회가 불안하다 하여 이민자를 혐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해될 수가 없다. 혹 잘못했다 해도 깊은 기독교 문화는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했을 것이다. 유럽국가의 극우세력이 이민자들과 무슬림 종교까지 멸시하는 태도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나라간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혹독히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기독교 문화에서 깊게 뿌리내린 신앙인들은 본토인이건 이방인이건 똑같이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실 그들은 그랬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그 일에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도가니탕에 흉악범을 넣고 단죄하자는 원성보다는 국민 모두가 일백여 명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국화꽃 송이를 헌화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한 분노와 진노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앙금까지 버리고, 신앙에서 배운 용서를 실천했다. 숭고할 정도로 성숙한 국민임을, 또한 그리스도 신앙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요즘 ‘도가니’ 라는 영화에서 보게 된 장애학교 시설에서의 부정과 불의를 보고 국민들은 분노를 끓이고 있다. 그런데 매번 도가니 탕을 끓이다가 국민 합의로 이루어진 성숙한 처방이 없었다. 늘 끔찍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도가니탕을 끓이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아마 흥행만이 돈이된다는 생각 뿐인것 같다.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이런 분노와 진노는 치유되지 않은 채 깊은 상처로 남아있을 뿐이다. 잠시 주제와 빗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도 다문화가 촉진되는 과정에서 사회가 불안해질 때면 그들처럼 극우들이 생겨날 것이다. 분노하고 노기 띤 사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도 노르웨이처럼 성숙함을 보이고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국민의 합의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임을 자각하고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이상, 그들을 어떤 처지에서든지 이질성이 아닌 동질성으로 대하고, 혹 누군가 잘못했을 때라도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 분노와 진노가 묻어나는 용서가 아닌, 그런 앙금까지 완전히 버릴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는 성숙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마태 18,22) 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행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상에 매단 사람까지 용서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하시며 용서하셨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도 그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며 예수님의 완전한 용서를 몸소 실천했다. 인간 내면에 어떤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집회27.30)고 하시며, 이런 분노와 진노의 앙금까지 내 몸 밖으로 완전히 없애는 것이 진정한 용서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용서한다고 하며 어디 그런가. 앙금이 언제나 남아 있는 상태다. 그래서 용서란 것이 우리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 안에서 매일 의지적으로 점검하고 노력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다.
요즘 극단적인 사람들은 미워해야할 대상도 아닌데도 혐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한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극단주의 청년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세)에 의해 자행된 테러 총기 난사 사건이 그 한 예이다. 복지국가 노르웨이는 어느 나라보다 행복하다. 그런데 석유관련 고된 직종에 일할 외국인 근로자들의 고용정책으로 많은 이국인이 이민을 오고, 전체 인구인 450만 명중 외국인 근로자가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민고용정책으로 불거진 청년실업, 빈곤, 경제침체에 따른 잿빛 미래 등이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이럴 즈음 극우파들은 이런 이민정책으로 생겨나는 다문화 사회는 극우의 반동으로 미워하고, 그들 종교인 무슬림까지 혐오한다. 이런 상황 하에 기독교 극단주의자의 소행은 어쩌면 계획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테러범은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 , 극우파들은 그의 행위를 옹호하고 나섰다. 일본 역시 지진과 쓰나미 이후, 원전사고의 바른 처방법 보다 이참에 핵으로 무장하자는 극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성하지 않는 미개한 일본의 생각이 그렇다 치자. 유럽은 뿌리 깊은 기독교 문화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사회가 불안하다 하여 이민자를 혐오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해될 수가 없다. 혹 잘못했다 해도 깊은 기독교 문화는 사랑으로 품어 주어야 했을 것이다. 유럽국가의 극우세력이 이민자들과 무슬림 종교까지 멸시하는 태도는 과거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나라간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혹독히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기독교 문화에서 깊게 뿌리내린 신앙인들은 본토인이건 이방인이건 똑같이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실 그들은 그랬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그 일에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도가니탕에 흉악범을 넣고 단죄하자는 원성보다는 국민 모두가 일백여 명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국화꽃 송이를 헌화했다. 국민들은 그에 대한 분노와 진노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앙금까지 버리고, 신앙에서 배운 용서를 실천했다. 숭고할 정도로 성숙한 국민임을, 또한 그리스도 신앙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요즘 ‘도가니’ 라는 영화에서 보게 된 장애학교 시설에서의 부정과 불의를 보고 국민들은 분노를 끓이고 있다. 그런데 매번 도가니 탕을 끓이다가 국민 합의로 이루어진 성숙한 처방이 없었다. 늘 끔찍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도가니탕을 끓이는 데만 익숙해져 있다. 아마 흥행만이 돈이된다는 생각 뿐인것 같다.그래서 우리 마음 안에 이런 분노와 진노는 치유되지 않은 채 깊은 상처로 남아있을 뿐이다. 잠시 주제와 빗나갔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도 다문화가 촉진되는 과정에서 사회가 불안해질 때면 그들처럼 극우들이 생겨날 것이다. 분노하고 노기 띤 사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도 노르웨이처럼 성숙함을 보이고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국민의 합의가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임을 자각하고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이상, 그들을 어떤 처지에서든지 이질성이 아닌 동질성으로 대하고, 혹 누군가 잘못했을 때라도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 분노와 진노가 묻어나는 용서가 아닌, 그런 앙금까지 완전히 버릴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는 성숙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