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시니"(마태11,25)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29 | 작성일 : 2011년 7월 25일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시니...”(마태11.25)
‘철부지’라는 뜻은 ‘철’과 ‘부지’의 합성어로, ‘철’은 때를 나타내는 우리말이고, ‘부지(不知)’는 한자어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어린 생명이 때를 모르는 상태를 빗대어 쓰는 말이다. 오랜만에 장마가 거치고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햇볕이 선을 보였다. 산책길에는 작달막한 코스모스 몇몇이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장마철에 일조량이 부족해서 철부지가 꽃을 피웠나 보다. 제 철에 제대로 한 몫 하려고 잎들이 무성한 채 하늘을 향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속에 몇몇 코스모스가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때를 몰라 피어난 꽃이 왠지 당당하지도 않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아, 외면하다가도 자꾸만 눈이 가서 바라보게 된다. 그들 꽃들의 수줍음 속에 있는 어떤 연민과 안쓰러움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란 어린 생명이라서 사리나 도리에 분명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성장하도록 잘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한 생명이 꽃을 피우고 충실한 열매가 맺도록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내는 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성령’의 불꽃으로 우리들의 부족한 마음을 눈뜨게 해주신다. 제대로 잘 알지 못할 것 같고, 알고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무지한 철부지 같은 사람들 속에서 말씀과 성체의 의미는 더욱 잘 드러난다.
얼마 전까지 서울의 신학생들 세 명이서 우리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신학생들이 말했다. “저희가 철부지 같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가려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희가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순수했으며,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매달릴 줄 압니다. 저희 같이 똑똑한 척도, 슬기로운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하느님이 더 잘 계셨습니다.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을 내치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더 잘 보여 주신다는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지닌 학교에 대한 오해나 고정관념을 깨끗이 불식시키는 은총의 시간이었으며, 하느님께서는 자기들도 사랑해주시지만 철부지 학생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점을 학교 생활 내내 배웠다며 소감을 말했다. 기도하며 학생들과 간격 없이 지낸 신학생들을 바라보며 우리 학생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신학생 성소도 찾아냈다. 한 학생이 아하, 신학생들도 저렇게 자유롭게 지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는 “신부님, 제 인생의 미래를 결정했습니다.” 라며 손에 낀 묵주를 나에게 넌지시 가리키고는, “성소가 제 마음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신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고, 그 떠난 자리에 철부지들이 남아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신학생들과 철부지들의 만남 사이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큰 축복이자 결실이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기뻐한다.
‘철부지’라는 뜻은 ‘철’과 ‘부지’의 합성어로, ‘철’은 때를 나타내는 우리말이고, ‘부지(不知)’는 한자어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어린 생명이 때를 모르는 상태를 빗대어 쓰는 말이다. 오랜만에 장마가 거치고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햇볕이 선을 보였다. 산책길에는 작달막한 코스모스 몇몇이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장마철에 일조량이 부족해서 철부지가 꽃을 피웠나 보다. 제 철에 제대로 한 몫 하려고 잎들이 무성한 채 하늘을 향해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속에 몇몇 코스모스가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때를 몰라 피어난 꽃이 왠지 당당하지도 않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아, 외면하다가도 자꾸만 눈이 가서 바라보게 된다. 그들 꽃들의 수줍음 속에 있는 어떤 연민과 안쓰러움 때문일 것이다. 철부지란 어린 생명이라서 사리나 도리에 분명치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성장하도록 잘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연약함을 지니고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한 생명이 꽃을 피우고 충실한 열매가 맺도록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내는 것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말씀’과 ‘성체’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성령’의 불꽃으로 우리들의 부족한 마음을 눈뜨게 해주신다. 제대로 잘 알지 못할 것 같고, 알고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무지한 철부지 같은 사람들 속에서 말씀과 성체의 의미는 더욱 잘 드러난다.
얼마 전까지 서울의 신학생들 세 명이서 우리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신학생들이 말했다. “저희가 철부지 같은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가려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희가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순수했으며,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매달릴 줄 압니다. 저희 같이 똑똑한 척도, 슬기로운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하느님이 더 잘 계셨습니다. 자칭 지혜롭다는 사람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을 내치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더 잘 보여 주신다는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지닌 학교에 대한 오해나 고정관념을 깨끗이 불식시키는 은총의 시간이었으며, 하느님께서는 자기들도 사랑해주시지만 철부지 학생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신다는 점을 학교 생활 내내 배웠다며 소감을 말했다. 기도하며 학생들과 간격 없이 지낸 신학생들을 바라보며 우리 학생들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신학생 성소도 찾아냈다. 한 학생이 아하, 신학생들도 저렇게 자유롭게 지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학생이 나에게 찾아와서는 “신부님, 제 인생의 미래를 결정했습니다.” 라며 손에 낀 묵주를 나에게 넌지시 가리키고는, “성소가 제 마음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신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고, 그 떠난 자리에 철부지들이 남아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신학생들과 철부지들의 만남 사이에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큰 축복이자 결실이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