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학생들이 사고의 전환점을 잘 맞이하길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777 | 작성일 : 2011년 9월 16일
위기의 학생들이 사고의 전환점을 잘 맞이하길
여름 방학이 한창 무렵인 8월 3일, 한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정 앞에는 그가 평소 즐겨 읽었던 책들이 수북이 싸여있고, 밝게 웃는 영정사진만이 조문객들을 말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딸을 잃고 실신한 어머니, ‘왜, 죽었냐’ 며 자문자답하며 애써 위안도 해보며 절규하는 아버지가 가련하다. 조문 온 선후배들이 그의 영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소녀티를 벗고 더 높게 성장하려다 멈춰 선 그를 보고 모두가 놀랐을 것이다. 고민한 흔적도 없이 항상 환하게 웃어 보였는데, 문학을 좋아하던 소녀가 학교나 집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며 예쁘게 성장했었는데, 우리는 그의 죽음이 참이 아니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영정 앞에 기도하며 큰절을 드려야 할 일이 아니었다. 수북이 쌓인 서적들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다보니, 그가 본 책에는 ‘죽음’이란 단어가 쉽게 들어왔다.
아마도 죽음으로 네가 꿈꾸던 세상에 가보고 싶었던 게로구나. 살다가 생의 의문점,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는 분명 철이 드는 징조인데 왜 그걸 몰랐을까. 바로 이 지점이 ‘사고의 전환점’이라는 거야. 그 전환점을 사람이 잘 맞이하면 죽음이 생명이 되고 의문의 모두가 유의미해질 수 있었는데, 네가 그걸 몰랐구나. 네가 모르면 어른들이 언덕을 넘는 생명의 꼭짓점이란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어야 하는 건데, 늦게야 후회가 된다. 청소년 시절, 모두가 너같이 힘든 성장 통을 거친단다. 현실이 주는 고통과 절망에서 딱 한 계단만 뛰어오르면 생명이 되는 건데, 안타깝게도 생을 접었구나.
입학할 때 쓴 그의 자기소개서를 읽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대체 왜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가, 공부는 오히려 학원에서 더 잘 가르치는데 왜 굳이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가. 학생들을 하나로 묶어 경쟁시키고, 획일화 시키는 것이 교육이다. 저녁 10시까지 공부했음은 물론이고, 집에 와서도 산더미 같은 숙제로 새벽 2시를 넘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속에서 내가 얻은 답은 모두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다녀야하는가 보다.’ 라고 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대안을 찾아 나섰다. ‘학교란 학생들이 각자의 개성과 잠재력을 살려 주어야하고, 행복하도록 키워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길 희망한다.
저는 ‘행복의 정복’이란 책에는.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며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는 부분이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이제 저는 이 곳(양업)에서 미래의 행복에 대한 꿈도 찾고, 그 꿈을 키워가며 정면으로 세상을 직시하며 돌파해나가는 용병술과 같은 전략을 세워갈 것이다. 그래서 이 학교를 졸업할 즈음하여 좀 더 성숙해서 누리는 ‘행복’을 찾아 낼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한 단계 뛰어 오르는 생명의 언덕에서 넘지 못하고 죽음으로 가져갔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는 어디를 갈 것인가를 놓고 방향을 잃을 때, 우리가 성취해야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결국 좌절하고 ‘죽음’이라는 곳ㅇ에 이른다. 고통이 있지만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는 사고체계의 변화를 일궈내지 못함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성숙한 부모와 교사들이 너와 같은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 생명으로의 변화를 이룰 기회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부모나 선생님들이 혹시나 사명을 다하지 못해 너에게 눈을 떼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그 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안히 하늘에서 잠들기를 양업인들과 함께 기도한다. 안녕히
여름 방학이 한창 무렵인 8월 3일, 한 학생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정 앞에는 그가 평소 즐겨 읽었던 책들이 수북이 싸여있고, 밝게 웃는 영정사진만이 조문객들을 말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딸을 잃고 실신한 어머니, ‘왜, 죽었냐’ 며 자문자답하며 애써 위안도 해보며 절규하는 아버지가 가련하다. 조문 온 선후배들이 그의 영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소녀티를 벗고 더 높게 성장하려다 멈춰 선 그를 보고 모두가 놀랐을 것이다. 고민한 흔적도 없이 항상 환하게 웃어 보였는데, 문학을 좋아하던 소녀가 학교나 집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며 예쁘게 성장했었는데, 우리는 그의 죽음이 참이 아니기를 얼마나 바랐던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의 영정 앞에 기도하며 큰절을 드려야 할 일이 아니었다. 수북이 쌓인 서적들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기다보니, 그가 본 책에는 ‘죽음’이란 단어가 쉽게 들어왔다.
아마도 죽음으로 네가 꿈꾸던 세상에 가보고 싶었던 게로구나. 살다가 생의 의문점, 도대체, 왜 라는 생각이 들 때면 이는 분명 철이 드는 징조인데 왜 그걸 몰랐을까. 바로 이 지점이 ‘사고의 전환점’이라는 거야. 그 전환점을 사람이 잘 맞이하면 죽음이 생명이 되고 의문의 모두가 유의미해질 수 있었는데, 네가 그걸 몰랐구나. 네가 모르면 어른들이 언덕을 넘는 생명의 꼭짓점이란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어야 하는 건데, 늦게야 후회가 된다. 청소년 시절, 모두가 너같이 힘든 성장 통을 거친단다. 현실이 주는 고통과 절망에서 딱 한 계단만 뛰어오르면 생명이 되는 건데, 안타깝게도 생을 접었구나.
입학할 때 쓴 그의 자기소개서를 읽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대체 왜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가, 공부는 오히려 학원에서 더 잘 가르치는데 왜 굳이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가. 학생들을 하나로 묶어 경쟁시키고, 획일화 시키는 것이 교육이다. 저녁 10시까지 공부했음은 물론이고, 집에 와서도 산더미 같은 숙제로 새벽 2시를 넘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런 속에서 내가 얻은 답은 모두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다녀야하는가 보다.’ 라고 쓰고 있었다. 그런 그가 대안을 찾아 나섰다. ‘학교란 학생들이 각자의 개성과 잠재력을 살려 주어야하고, 행복하도록 키워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길 희망한다.
저는 ‘행복의 정복’이란 책에는. ‘미래만 주시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결과에 따라 현재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버릇은 위험하다’ 며 ‘각각의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그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는 부분이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이제 저는 이 곳(양업)에서 미래의 행복에 대한 꿈도 찾고, 그 꿈을 키워가며 정면으로 세상을 직시하며 돌파해나가는 용병술과 같은 전략을 세워갈 것이다. 그래서 이 학교를 졸업할 즈음하여 좀 더 성숙해서 누리는 ‘행복’을 찾아 낼 것이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한 단계 뛰어 오르는 생명의 언덕에서 넘지 못하고 죽음으로 가져갔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우리는 어디를 갈 것인가를 놓고 방향을 잃을 때, 우리가 성취해야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 결국 좌절하고 ‘죽음’이라는 곳ㅇ에 이른다. 고통이 있지만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는 사고체계의 변화를 일궈내지 못함을 더욱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성숙한 부모와 교사들이 너와 같은 미성숙한 청소년들에게 생명으로의 변화를 이룰 기회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부모나 선생님들이 혹시나 사명을 다하지 못해 너에게 눈을 떼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그 학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평안히 하늘에서 잠들기를 양업인들과 함께 기도한다.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