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이 지향하는 교육은?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867 | 작성일 : 2012년 9월 4일
가톨릭이 지향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주교님들도 모이면 ‘각 교구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보냈느냐?’며 숫자를 자랑한다고 들었다. 가톨릭학교 대부분이 준 공립화되고, 치열한 생존전략으로 학생들을 명문대 에 진학시키는 것이 유일의 목적이 되었다. 가톨릭 내에서도 명문학교와 좋은 학교라는 의미는 복음적이지 못하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명문의 좋은 학교란 교육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이다. 하느님의 학교, 사랑의 학교로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랑으로 연결된 학교여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지니는 브랜드 효과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학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가톨릭이 지향할 교육은 학교의 건학이념과 학교헌장을 토대로 단위학교의 교육주체들이 사랑으로 연결되고, 학교에서 복음을 내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가톨릭 학교의 일부 관리자들이 인성교육을 뛰어넘는 대안카드로 ‘영성교육’을 꺼내들고 있지만, 많은 학교장들의 이를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시큰둥하다. 한마디로 간섭과 제약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심화하려는 주체들이 많아지는 것, 예수님을 성사적인 삶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였다. 가톨릭 학교들은 여러 고질적 제약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정체성답게 복음을 내면화할 교육 방법들을 모색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학교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가톨릭 학교의 준 공립화로 그런 제안들을 받아드리기가 어렵다면, 각 교구가 가톨릭답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의 학생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방법도 교육의 부활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진단하면서 대한민국의 왜곡된 교육을 바로 잡아 세우고, 교육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교육의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랐던 미성숙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이루는 방법을 배웠으며, 제자들은 인간다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간 만들기를 끝내지 아니하고 협조자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도록해주셨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튼튼해졌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주역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목숨 바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인이 된 부모와 교사가 복음을 내면화하여 튼튼한 인성교육의 주체가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며 인성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해야 한다.
교육에서 인성교육의 몫이 ‘나’를 세우는 교육이라면, 영성교육의 몫은 내 학교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생명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단절된 교육의 구성원들을 살려내는 방법이며, 학생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교육이며,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육이다. 내가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교육이 바로 ‘영성교육’이다.
가톨릭 학교로서 학교현실의 과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성원들의 유기체적인 연결로 이루어진 영성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의 부활을 실현해 가야 한다. 경쟁과 성과위주의 평가 등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붕괴되어가는 학교공동체를 대책 없다며 탓할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성사적 삶을 실천해 가며, 학교가 학생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울타리 역할을 해 준다면 오늘보다 훨씬 교육현장은 행복해 질 것이다. 행복한 미래교육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자고 당부코자 한다.
주교님들도 모이면 ‘각 교구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보냈느냐?’며 숫자를 자랑한다고 들었다. 가톨릭학교 대부분이 준 공립화되고, 치열한 생존전략으로 학생들을 명문대 에 진학시키는 것이 유일의 목적이 되었다. 가톨릭 내에서도 명문학교와 좋은 학교라는 의미는 복음적이지 못하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명문의 좋은 학교란 교육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이다. 하느님의 학교, 사랑의 학교로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랑으로 연결된 학교여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지니는 브랜드 효과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학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가톨릭이 지향할 교육은 학교의 건학이념과 학교헌장을 토대로 단위학교의 교육주체들이 사랑으로 연결되고, 학교에서 복음을 내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가톨릭 학교의 일부 관리자들이 인성교육을 뛰어넘는 대안카드로 ‘영성교육’을 꺼내들고 있지만, 많은 학교장들의 이를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시큰둥하다. 한마디로 간섭과 제약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심화하려는 주체들이 많아지는 것, 예수님을 성사적인 삶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였다. 가톨릭 학교들은 여러 고질적 제약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정체성답게 복음을 내면화할 교육 방법들을 모색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학교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가톨릭 학교의 준 공립화로 그런 제안들을 받아드리기가 어렵다면, 각 교구가 가톨릭답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의 학생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방법도 교육의 부활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진단하면서 대한민국의 왜곡된 교육을 바로 잡아 세우고, 교육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교육의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따랐던 미성숙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이루는 방법을 배웠으며, 제자들은 인간다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간 만들기를 끝내지 아니하고 협조자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도록해주셨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튼튼해졌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주역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목숨 바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인이 된 부모와 교사가 복음을 내면화하여 튼튼한 인성교육의 주체가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며 인성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해야 한다.
교육에서 인성교육의 몫이 ‘나’를 세우는 교육이라면, 영성교육의 몫은 내 학교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생명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단절된 교육의 구성원들을 살려내는 방법이며, 학생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교육이며,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육이다. 내가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교육이 바로 ‘영성교육’이다.
가톨릭 학교로서 학교현실의 과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성원들의 유기체적인 연결로 이루어진 영성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의 부활을 실현해 가야 한다. 경쟁과 성과위주의 평가 등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붕괴되어가는 학교공동체를 대책 없다며 탓할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성사적 삶을 실천해 가며, 학교가 학생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울타리 역할을 해 준다면 오늘보다 훨씬 교육현장은 행복해 질 것이다. 행복한 미래교육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자고 당부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