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장의 실제와 가톨릭학교교육의 과제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553 | 작성일 : 2012년 9월 9일
교육현장의 실제와 가톨릭 학교교육의 과제
양업고등학교
교장 윤병훈 신부
1. 대한민국 사회의 교육현실
모든 생명은 심을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으며, 꽃 필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다. 각 생명마다 특성에 맞는 때가 있기에 존중해가며, 성장과 성숙을 도와야 한다. 그 책임은 생명의 관리자에게 있다. ‘교육하다’(educare)라는 라틴어 동사가 지니는 의미는, 교육의 주체인 생명 관리자가 미성숙한 피교육자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하여, 그들 생명 속에서 내재된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여 주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전인적인 참 자아를 실현하는 왕성한 활동과정을 뜻한다.
과연 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의 본질에 맞게 추구하고 있는가? 인성과 지식을 겸비한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정을 교육목적에 부합하도록 성실하게 접근하고 있는가? 또한 가톨릭 학교는 복음의 사회화’에 바탕을 두어 교육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가?
오늘의 교육은 그 본질과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려는 진정성보다는, 시장경제 논리로 학생의 생명을 경쟁에 참여시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의 인간 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학생에게 수월성의 잣대를 요구하며 선행학습하고, 평가하며, 그 결과를 서열화하여 교육성과를 가늠하고 있다. 여기에 모든 교육자들은 조급해지며 학생을 급조하려고 외적통제로 일관하며 교육을 한다. 학습부진아들이 모인 학교는 학생들에게 감옥일 뿐이다.
1)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관계
우리네 부모들은 교육에 척척박사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실상 부모는 교육에 대해 문외한이다. 높은 교육열에 비해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자녀를 낳아 교육하는 것이 처음 겪는 일인지라, 학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는 청소년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 사춘기의 자녀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엇보다 그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 부모는 자녀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고, 수준 이하의 성적을 대할 때면, 자녀를 비난하고 다그치는 것이 부모 역할의 전부이다. 부모는 자녀의 자발성과 자기주도성의 신장을 키워주는 기다림에 인색하고, 자녀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질 것처럼 미래의 진로까지 조정한다. 만일 부모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부모는 강도 높게 설교, 잔소리를 한다. 여기에 대한 자녀의 반응은 두 가지이다. 통제가 싫어 부모에게 심하게 반항하거나, 마미보이가 되어 부모 눈치를 보며 무기력해진다. 이러한 청소년들은 우울증, 자살충동, 정서불안 증후군 등의 고위기군에 시달리거나, 열등감에 시달려 소외감 증대로 문제 학생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가도록 경험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성적이라는 현실 문제만 가지고 발을 동동거릴 뿐이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생겨난 자녀와의 관계단절은 자녀의 성장과 성숙을 멈추게 하며 자식농사를 폐농하게 한다.
2)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모든 학교는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해 학생을 끊임없이 경쟁시켜 생산라인에 투입한다. 교육은 분명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경쟁이 아니다. 실용교육에 집중된 교육은 대한민국이 최고일 것이다. 요즘 동물 사육면적의 협소로 스트레스를 입은 동물에게도 ‘동물복지’라는 말을 사용하여, 사육면적과 환경을 늘리고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우리의 교육 복지는 청소년들이 미래를 꿈꾸게 하고 스스로 진로를 찾게 하여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교육여건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학생들을 위한 교육복지로 무상급식에 신경을 쓰는 예도 경쟁을 위한 발상일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학생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지내야 하고, 더 늦은 시간에는 선행학습을 위해 고비용의 사교육비를 지출하여 밤늦도록 승부를 걸 듯 자신과 싸우고, 이로써 가정경제도 휘청거린다.
청소년 시절은 매우 중요해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 힘을 기르기 위해 ‘세상보기’를 하며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의 단순지식 뿐 아니라 왕성한 독서활동으로 다양한 지식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렇게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지식이 내면에서 종합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학생들은 졸업 후 자기 고유의 창의적 작품을 창작할 수 있고, 학생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행복을 꿈꿀 수 있다.
학생들이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시켜주는 일은 학교관리자의 책무이다. 그러나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인성을 다듬어 주고 그들 속마음을 읽어줄 생명관리자가 적다는 것이 문제이다. 전문교과의 교과활동 외에 생활지도와 상담을 경험한 상담사례가 없어 문제해결은 한계가 있다. 인간관계는 오르지 사무적이고 의례적일 뿐 머리싸움만 시켜 수재를 양성하는 것이 학교의 일이 되었다. 교육은 단편의 지식을 섭취하여 성적 올리기 작업이 되었으며, 인성교과를 통한 도덕과 윤리, 정의와 사랑을 배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건강한 인격체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인재를 만드는 데에 소홀하다.
학교의 교사는 올바른 교직관을 갖고 교단에 서야 한다. 단지 교사가 안정된 직업이라는 것에서 출발하여, 고교 내신 1등급의 학생들이 사범대학을 선택한다. 막상 교직에 임용되면, 그 생활이 녹녹치 않음을 알고는 회의하기 시작한다. 교직의 선택이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안 된다. 학생들의 생명을 풍요롭게 가구는데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 만나기를 좋아해서 교직을 선택했다면, 자신은 물론 미래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요즘의 많은 학교는 학생과 교사의 기 싸움으로 팽팽하며, 교사와 학생의 간격은 마치 마라톤 거리만큼 벌어져 있다. 이에 교사는 학생들을 강력한 수단들로 통제하고 학생들은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권과 인권 사이에 시비가 붙고 학교의 꼴은 웃음거리가 되고 점점 비참해진다. 수재형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스트레스 받고,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한다. 이를 바라보는 학교는 학부모처럼 조급하고, 강제하며 학생들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교사와 학부모 간 유대는 점점 약화된다.
2. 가톨릭 학교 교육이 풀어야할 과제
1) 가톨릭이 지향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주교님들도 모이면 ‘각 교구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보냈느냐?’며 숫자를 자랑한다고 들었다. 가톨릭학교 대부분이 준 공립화 되고, 치열한 생존전략으로 학생들을 명문대 에 진학시키는 것이 유일의 목적이 되었다. 가톨릭 내에서도 명문학교와 좋은 학교라는 의미는 복음적이지 못하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명문의 좋은 학교란 교육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이다. 하느님의 학교, 사랑의 학교로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랑으로 연결된 학교여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지니는 브랜드 효과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학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가톨릭이 지향할 교육은 학교의 건학이념과 학교헌장을 토대로 단위학교의 교육주체들이 사랑으로 연결되고, 학교에서 복음을 내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가톨릭 학교의 일부 관리자들이 인성교육을 뛰어넘는 대안카드로 ‘영성교육’을 꺼내들고 있지만, 많은 학교장들의 이를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시큰둥하다. 한마디로 간섭과 제약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심화하려는 주체들이 많아지는 것, 예수님을 성사적인 삶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였다. 가톨릭 학교들은 여러 고질적 제약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정체성 답게 복음을 내면화할 교육 방법들을 모색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학교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노력이 우리의 교육방법이라 하겠다. 가톨릭 학교의 준 공립화로 그런 제안들을 받아드리기가 어렵다면, 각 교구가 가톨릭답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의 학생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방법도 새로운 가톨릭학교의 위상을 바로잡고 진정한 교육의 부활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2) 영성교육으로 교육의 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건강한 교회공동체는 약자들을 향한 교회여야 한다. 생명관리자들인 목자들이 내면이 망가져 있는 대상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들을 품어 안을 만큼 측은지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기로 출발했다면, 자신을 양들에게 낮추며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양 앞에 군림하는 것만 배워 간다. 예수님이 그를 따르던 모두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섬기며 품어 주셨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이런 삶이 교육현장에서 녹아들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가톨릭 학교의 모습이다.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진단하면서 대한민국의 왜곡된 교육을 바로 잡아 세우고, 교육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교육의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랐던 미성숙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이루는 방법을 배웠으며, 제자들은 인간다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간 만들기를 끝내지 아니하고 협조자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도록해주셨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튼튼해졌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주역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목숨 바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인이 된 부모와 교사가 복음을 내면화하여 튼튼한 인성교육의 주체가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며 인성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해야 한다. 이는 바로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을 의미한다. 교육에서 인성교육의 몫이 ‘나’를 세우는 교육이라면, 영성교육의 몫은 내 학교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생명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단절된 교육의 구성원들을 살려내는 방법이며, 학생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교육이며,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육이다. 내가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교육이 바로 ‘영성교육’이다. 가톨릭 학교로서 학교현실의 과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성원들의 유기체적인 연결로 이루어진 영성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의 부활을 실현해 가야 한다. 경쟁과 성과위주의 평가 등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붕괴되어가는 학교공동체를 대책 없다며 탓할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성사적 삶을 실천해 가며, 학교가 학생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울타리 역할을 해 준다면 오늘보다 훨씬 교육현장은 행복해 질 것이다. 행복한 미래교육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자고 당부코자 한다.
양업고등학교
교장 윤병훈 신부
1. 대한민국 사회의 교육현실
모든 생명은 심을 때가 있고, 자랄 때가 있으며, 꽃 필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다. 각 생명마다 특성에 맞는 때가 있기에 존중해가며, 성장과 성숙을 도와야 한다. 그 책임은 생명의 관리자에게 있다. ‘교육하다’(educare)라는 라틴어 동사가 지니는 의미는, 교육의 주체인 생명 관리자가 미성숙한 피교육자에게 사랑과 관심으로 대하여, 그들 생명 속에서 내재된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여 주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전인적인 참 자아를 실현하는 왕성한 활동과정을 뜻한다.
과연 대한민국의 교육은 교육의 본질에 맞게 추구하고 있는가? 인성과 지식을 겸비한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정을 교육목적에 부합하도록 성실하게 접근하고 있는가? 또한 가톨릭 학교는 복음의 사회화’에 바탕을 두어 교육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가?
오늘의 교육은 그 본질과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려는 진정성보다는, 시장경제 논리로 학생의 생명을 경쟁에 참여시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의 인간 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모든 학생에게 수월성의 잣대를 요구하며 선행학습하고, 평가하며, 그 결과를 서열화하여 교육성과를 가늠하고 있다. 여기에 모든 교육자들은 조급해지며 학생을 급조하려고 외적통제로 일관하며 교육을 한다. 학습부진아들이 모인 학교는 학생들에게 감옥일 뿐이다.
1)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관계
우리네 부모들은 교육에 척척박사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실상 부모는 교육에 대해 문외한이다. 높은 교육열에 비해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자녀를 낳아 교육하는 것이 처음 겪는 일인지라, 학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는 청소년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 사춘기의 자녀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엇보다 그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 부모는 자녀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고, 수준 이하의 성적을 대할 때면, 자녀를 비난하고 다그치는 것이 부모 역할의 전부이다. 부모는 자녀의 자발성과 자기주도성의 신장을 키워주는 기다림에 인색하고, 자녀의 미래를 끝까지 책임질 것처럼 미래의 진로까지 조정한다. 만일 부모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부모는 강도 높게 설교, 잔소리를 한다. 여기에 대한 자녀의 반응은 두 가지이다. 통제가 싫어 부모에게 심하게 반항하거나, 마미보이가 되어 부모 눈치를 보며 무기력해진다. 이러한 청소년들은 우울증, 자살충동, 정서불안 증후군 등의 고위기군에 시달리거나, 열등감에 시달려 소외감 증대로 문제 학생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가도록 경험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성적이라는 현실 문제만 가지고 발을 동동거릴 뿐이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생겨난 자녀와의 관계단절은 자녀의 성장과 성숙을 멈추게 하며 자식농사를 폐농하게 한다.
2) 학교에서의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모든 학교는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해 학생을 끊임없이 경쟁시켜 생산라인에 투입한다. 교육은 분명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경쟁이 아니다. 실용교육에 집중된 교육은 대한민국이 최고일 것이다. 요즘 동물 사육면적의 협소로 스트레스를 입은 동물에게도 ‘동물복지’라는 말을 사용하여, 사육면적과 환경을 늘리고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우리의 교육 복지는 청소년들이 미래를 꿈꾸게 하고 스스로 진로를 찾게 하여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교육여건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학생들을 위한 교육복지로 무상급식에 신경을 쓰는 예도 경쟁을 위한 발상일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학생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지내야 하고, 더 늦은 시간에는 선행학습을 위해 고비용의 사교육비를 지출하여 밤늦도록 승부를 걸 듯 자신과 싸우고, 이로써 가정경제도 휘청거린다.
청소년 시절은 매우 중요해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 힘을 기르기 위해 ‘세상보기’를 하며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의 단순지식 뿐 아니라 왕성한 독서활동으로 다양한 지식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렇게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지식이 내면에서 종합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학생들은 졸업 후 자기 고유의 창의적 작품을 창작할 수 있고, 학생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행복을 꿈꿀 수 있다.
학생들이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를 무사히 통과시켜주는 일은 학교관리자의 책무이다. 그러나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인성을 다듬어 주고 그들 속마음을 읽어줄 생명관리자가 적다는 것이 문제이다. 전문교과의 교과활동 외에 생활지도와 상담을 경험한 상담사례가 없어 문제해결은 한계가 있다. 인간관계는 오르지 사무적이고 의례적일 뿐 머리싸움만 시켜 수재를 양성하는 것이 학교의 일이 되었다. 교육은 단편의 지식을 섭취하여 성적 올리기 작업이 되었으며, 인성교과를 통한 도덕과 윤리, 정의와 사랑을 배워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건강한 인격체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인재를 만드는 데에 소홀하다.
학교의 교사는 올바른 교직관을 갖고 교단에 서야 한다. 단지 교사가 안정된 직업이라는 것에서 출발하여, 고교 내신 1등급의 학생들이 사범대학을 선택한다. 막상 교직에 임용되면, 그 생활이 녹녹치 않음을 알고는 회의하기 시작한다. 교직의 선택이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안 된다. 학생들의 생명을 풍요롭게 가구는데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교사가 학생 만나기를 좋아해서 교직을 선택했다면, 자신은 물론 미래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요즘의 많은 학교는 학생과 교사의 기 싸움으로 팽팽하며, 교사와 학생의 간격은 마치 마라톤 거리만큼 벌어져 있다. 이에 교사는 학생들을 강력한 수단들로 통제하고 학생들은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권과 인권 사이에 시비가 붙고 학교의 꼴은 웃음거리가 되고 점점 비참해진다. 수재형 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으로 스트레스 받고,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한다. 이를 바라보는 학교는 학부모처럼 조급하고, 강제하며 학생들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교사와 학부모 간 유대는 점점 약화된다.
2. 가톨릭 학교 교육이 풀어야할 과제
1) 가톨릭이 지향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주교님들도 모이면 ‘각 교구 학교에서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보냈느냐?’며 숫자를 자랑한다고 들었다. 가톨릭학교 대부분이 준 공립화 되고, 치열한 생존전략으로 학생들을 명문대 에 진학시키는 것이 유일의 목적이 되었다. 가톨릭 내에서도 명문학교와 좋은 학교라는 의미는 복음적이지 못하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명문의 좋은 학교란 교육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이다. 하느님의 학교, 사랑의 학교로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랑으로 연결된 학교여야 한다. 물론 가톨릭이 지니는 브랜드 효과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학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가톨릭이 지향할 교육은 학교의 건학이념과 학교헌장을 토대로 단위학교의 교육주체들이 사랑으로 연결되고, 학교에서 복음을 내면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한 가지 예로 가톨릭 학교의 일부 관리자들이 인성교육을 뛰어넘는 대안카드로 ‘영성교육’을 꺼내들고 있지만, 많은 학교장들의 이를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시큰둥하다. 한마디로 간섭과 제약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께서 ‘새로운 복음화’를 말씀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심화하려는 주체들이 많아지는 것, 예수님을 성사적인 삶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의미였다. 가톨릭 학교들은 여러 고질적 제약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정체성 답게 복음을 내면화할 교육 방법들을 모색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학교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노력이 우리의 교육방법이라 하겠다. 가톨릭 학교의 준 공립화로 그런 제안들을 받아드리기가 어렵다면, 각 교구가 가톨릭답게 공교육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의 학생들을 위한 여러 형태의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방법도 새로운 가톨릭학교의 위상을 바로잡고 진정한 교육의 부활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2) 영성교육으로 교육의 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건강한 교회공동체는 약자들을 향한 교회여야 한다. 생명관리자들인 목자들이 내면이 망가져 있는 대상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들을 품어 안을 만큼 측은지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기로 출발했다면, 자신을 양들에게 낮추며 살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양 앞에 군림하는 것만 배워 간다. 예수님이 그를 따르던 모두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섬기며 품어 주셨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이런 삶이 교육현장에서 녹아들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가톨릭 학교의 모습이다.
우리의 현실과 과제를 진단하면서 대한민국의 왜곡된 교육을 바로 잡아 세우고, 교육부활을 이루어 내야 한다. 교육의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랐던 미성숙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참 생명을 이루는 방법을 배웠으며, 제자들은 인간다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간 만들기를 끝내지 아니하고 협조자 성령님을 보내주시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만지도록해주셨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튼튼해졌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증언하며 하느님 나라 건설을 주역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목숨 바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앙인이 된 부모와 교사가 복음을 내면화하여 튼튼한 인성교육의 주체가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탁하며 인성교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해야 한다. 이는 바로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을 의미한다. 교육에서 인성교육의 몫이 ‘나’를 세우는 교육이라면, 영성교육의 몫은 내 학교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을 바꿀 수 있는 생명교육이다. 이런 교육은 단절된 교육의 구성원들을 살려내는 방법이며, 학생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극복하려는 교육이며, 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교육이다. 내가 행복하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만드는 사랑의 교육이 바로 ‘영성교육’이다. 가톨릭 학교로서 학교현실의 과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성원들의 유기체적인 연결로 이루어진 영성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의 부활을 실현해 가야 한다. 경쟁과 성과위주의 평가 등으로 관계가 단절되고 붕괴되어가는 학교공동체를 대책 없다며 탓할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성사적 삶을 실천해 가며, 학교가 학생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울타리 역할을 해 준다면 오늘보다 훨씬 교육현장은 행복해 질 것이다. 행복한 미래교육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자고 당부코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