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할 줄 모르는 천재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02 | 작성일 : 2012년 5월 14일
‘감사할 줄 모르는 천재들’
네팔의 산행에서 짐을 나르고 길을 안내해주는 동반자가 있는 데, 이를 ‘셰르파’라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있기에 산행이 무척 힘들어도, 믿음이 가고 즐겁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길 안내자인 그들은 우리에게 신변 안전의 지킴이 역할이 되어 주었고, 때로는 가벼운 등짐도 들어주며 힘들어 끙끙댈 때 ‘포터’가 되어 도와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목적했던 눈높이까지 몇 날 며칠을 쉼 없이 걸어 올라갈 수 있었으며, 기쁨을 마음에 새기고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네팔 산행을 끝냈을 때는 내 자랑만 늘어놓았었다. 나에게 길이 되어 주고 도움을 주던 ‘셰르파’의 고마움은 내 마음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잘 된 것은 내가 건강해서, 내가 잘났기 때문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전부였다. 첫 산행에서 그들과 헤어질 때는 나는 그들에게 그 흔한 감사도 표하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그런데 두 번째 네팔 산행을 할 때는,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셰르파’도, 내 등짐을 지고 산을 펄펄 날았던 ‘포터’도 보였다. 제대로 된 신발 하나 없어 슬리퍼를 신고 산길을 내 달리던 ‘포터’가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 생명이었는가를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산을 오른 것도, 기쁨을 간직하고 하산한 것도 ‘셰르파’와 ‘포터’기 있기에 가능했음을 겨우 보게 되었고, 아무 감사도 표현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그들에게 죄스러울 뿐이었다.
고등학교의 한 진로진학상담교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명문대를 합격시켰는데도 선생님에게 감사 한마디 없어요.” 공부벌레들이라서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감사는 기본인데 하며 섭섭해 했다. 선생님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조언으로 학생을 도왔을까. 일의 결과를 놓고 한 번 쯤은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공부벌레들은 자기 실력으로, 자기가 뛰어난 머리로 이룬 결과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 세상 일이 혼자서 이루는 일이 있는가 말이다.
교육의 목적 중 첫째는 ‘사람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 인성을 토양삼아 ‘훌륭한 인재’로 양성시키는 것이라면, 명문대 합격자들 대부분은 첫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훌륭한 인재'가 된다. 그들은 나만 알고 너를 모르는 ‘돌 머리 천재’들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 학생들을 다르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간성 좋고’, 늦둥이지만 철이 들면 훌륭한 인재가 되어 나타나서 시시 때때로 감사할 줄 안다. ‘머리 좋은 진정한 천재’들인 셈이다.
우리들은 세례성사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오래도록 지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하느님의 보고 만나서 감사를 드렸어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주체인 그분과 걸어가며 확신하고 감사드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 말 하면서도 좀처럼 주체이신 그 분께 감사할 줄 모른다. 툭하면 거지 근성으로 하느님께 달라는 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청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을 불신하기도하고 원망하며 때로는 헌신짝처럼 버리기까지 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사는 신앙인들이라지만, 자화자찬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간다. 우리 또한 ‘돌 머리 천재 신앙인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자신이 삶의 주체이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살도록 항상 함께하며 도와주시는 진짜 주체가 계시다. 그 분들이 있기에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네팔의 산행에서 짐을 나르고 길을 안내해주는 동반자가 있는 데, 이를 ‘셰르파’라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있기에 산행이 무척 힘들어도, 믿음이 가고 즐겁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길 안내자인 그들은 우리에게 신변 안전의 지킴이 역할이 되어 주었고, 때로는 가벼운 등짐도 들어주며 힘들어 끙끙댈 때 ‘포터’가 되어 도와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목적했던 눈높이까지 몇 날 며칠을 쉼 없이 걸어 올라갈 수 있었으며, 기쁨을 마음에 새기고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네팔 산행을 끝냈을 때는 내 자랑만 늘어놓았었다. 나에게 길이 되어 주고 도움을 주던 ‘셰르파’의 고마움은 내 마음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잘 된 것은 내가 건강해서, 내가 잘났기 때문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전부였다. 첫 산행에서 그들과 헤어질 때는 나는 그들에게 그 흔한 감사도 표하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그런데 두 번째 네팔 산행을 할 때는,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셰르파’도, 내 등짐을 지고 산을 펄펄 날았던 ‘포터’도 보였다. 제대로 된 신발 하나 없어 슬리퍼를 신고 산길을 내 달리던 ‘포터’가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 생명이었는가를 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산을 오른 것도, 기쁨을 간직하고 하산한 것도 ‘셰르파’와 ‘포터’기 있기에 가능했음을 겨우 보게 되었고, 아무 감사도 표현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그들에게 죄스러울 뿐이었다.
고등학교의 한 진로진학상담교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명문대를 합격시켰는데도 선생님에게 감사 한마디 없어요.” 공부벌레들이라서 인간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감사는 기본인데 하며 섭섭해 했다. 선생님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조언으로 학생을 도왔을까. 일의 결과를 놓고 한 번 쯤은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다. 공부벌레들은 자기 실력으로, 자기가 뛰어난 머리로 이룬 결과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 세상 일이 혼자서 이루는 일이 있는가 말이다.
교육의 목적 중 첫째는 ‘사람이 인간다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그 인성을 토양삼아 ‘훌륭한 인재’로 양성시키는 것이라면, 명문대 합격자들 대부분은 첫째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훌륭한 인재'가 된다. 그들은 나만 알고 너를 모르는 ‘돌 머리 천재’들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 학생들을 다르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인간성 좋고’, 늦둥이지만 철이 들면 훌륭한 인재가 되어 나타나서 시시 때때로 감사할 줄 안다. ‘머리 좋은 진정한 천재’들인 셈이다.
우리들은 세례성사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오래도록 지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하느님의 보고 만나서 감사를 드렸어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주체인 그분과 걸어가며 확신하고 감사드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 말 하면서도 좀처럼 주체이신 그 분께 감사할 줄 모른다. 툭하면 거지 근성으로 하느님께 달라는 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청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을 불신하기도하고 원망하며 때로는 헌신짝처럼 버리기까지 한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사는 신앙인들이라지만, 자화자찬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간다. 우리 또한 ‘돌 머리 천재 신앙인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자신이 삶의 주체이지만, 우리가 주체가 되어 살도록 항상 함께하며 도와주시는 진짜 주체가 계시다. 그 분들이 있기에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진정으로 감사드려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