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삶에서 최선의 삶이란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698 | 작성일 : 2012년 6월 6일
공동체의 삶에서 최선의 삶이란
학교에서 늦은 9시, 모든 일과가 종료되는 시점이다. 각과 교실은 문이 닫히고, 선생님들도 일을 종료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숙사 생활이 시작한다. 밤 11시에 소등을 할 시간까지 학생들은 씻기, 기숙사 청소를 하며, 빨래도 세탁하고, 하루를 마치고 생각을 키우는 ‘마무리 글살이 시간’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학생들이 이러한 시간을 잘 지낼 수 있도록 학생들과 교사들은 ‘학교 생활내규’를 만들었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행복감과 자유, 아름다움이 되도록 공동체가 모여 만든 규칙이다. 그럼으로 이 규칙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잘 숙지하고 자발적으로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규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잘 지켜지지 않아 종종 구성원 간에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를 본다. 밤 9시, 각과 교실은 정확히 불이 꺼지고 학생들은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런데 성격의 차이인지 적당히 하는 교사들이 있다. 한 교과실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줄 수박을 자르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관리자는 “무슨 일이냐? 9시가 지나고 있는데.” 라고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자, 관리자는 “멈추고, 불 끄세요.”라고 명령했다. 선생님들이 “곧 마무리 하고 올라가겠습니다.” 하자, 관리자는 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분노가 폭발한 상황에서 선생님들은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교과실을 성급히 빠져 나갔다. 다음 날, 관리자는 직원 조회 시에 선생님들을 향해 “모든 선생님들, ‘학교생활 내규’를 꼭 읽어보세요.” 하고는 어제 있었던 선생님들에게 경위서를 쓰라고 지시를 했다. 이 사안을 놓고 선생님들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선생님들이 나에게 찾아 왔다. “사랑의 학교에서 그렇게 원칙이 중요한 것입니까?” 라고 따져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이 사안을 놓고 누가 잘한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린다면 분명 의견은 찬반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관리자는 평소에 빈틈이 없고 철저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며 매번 규칙을 잘 지켜주기를 선생님들에게 당부하며 사는 성격이고, 선생님들은 적당히 시간을 넘겨서라도 간식을 학생들에게 마련해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중재를 해야 했다. 서로가 납득이 가도록 말이다. 한 쪽을 두둔하고 한 쪽을 편들면 중재는 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정의’를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미덕으로 갈 수 있는 처방을 내 놓아야 한다.
관리자는 규칙을 어겨가며 사랑을 하는 행위는 결코 사랑이라고 용납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그런 것을 알았더라면 그를 화나지 않도록 사전에 협조를 구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인가를 알리고 규칙을 뛰어넘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했어야 한다. 선생님들의 행위가 비록 사랑의 행위라 하지만, 공동체를 늘 살피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규칙 위반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가 없다. 규칙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행위가 진정한 사랑인가를 엄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혼자 산다면 정의, 법, 행복, 자유, 미덕 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공동체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덕을 지니며 살아가기를 바라기에 따지는 것이다. 규칙은 누구도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서로에게 최선의 삶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라고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학교에서 늦은 9시, 모든 일과가 종료되는 시점이다. 각과 교실은 문이 닫히고, 선생님들도 일을 종료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숙사 생활이 시작한다. 밤 11시에 소등을 할 시간까지 학생들은 씻기, 기숙사 청소를 하며, 빨래도 세탁하고, 하루를 마치고 생각을 키우는 ‘마무리 글살이 시간’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학생들이 이러한 시간을 잘 지낼 수 있도록 학생들과 교사들은 ‘학교 생활내규’를 만들었다. 이는 학생들이 학교생활에서 행복감과 자유, 아름다움이 되도록 공동체가 모여 만든 규칙이다. 그럼으로 이 규칙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잘 숙지하고 자발적으로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규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잘 지켜지지 않아 종종 구성원 간에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를 본다. 밤 9시, 각과 교실은 정확히 불이 꺼지고 학생들은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런데 성격의 차이인지 적당히 하는 교사들이 있다. 한 교과실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줄 수박을 자르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관리자는 “무슨 일이냐? 9시가 지나고 있는데.” 라고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자, 관리자는 “멈추고, 불 끄세요.”라고 명령했다. 선생님들이 “곧 마무리 하고 올라가겠습니다.” 하자, 관리자는 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화를 삭이지 못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분노가 폭발한 상황에서 선생님들은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교과실을 성급히 빠져 나갔다. 다음 날, 관리자는 직원 조회 시에 선생님들을 향해 “모든 선생님들, ‘학교생활 내규’를 꼭 읽어보세요.” 하고는 어제 있었던 선생님들에게 경위서를 쓰라고 지시를 했다. 이 사안을 놓고 선생님들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선생님들이 나에게 찾아 왔다. “사랑의 학교에서 그렇게 원칙이 중요한 것입니까?” 라고 따져 물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이 사안을 놓고 누가 잘한 것인가를 놓고 토론을 벌린다면 분명 의견은 찬반으로 갈라질 것입니다. 관리자는 평소에 빈틈이 없고 철저하고 완벽하기를 바라며 매번 규칙을 잘 지켜주기를 선생님들에게 당부하며 사는 성격이고, 선생님들은 적당히 시간을 넘겨서라도 간식을 학생들에게 마련해 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중재를 해야 했다. 서로가 납득이 가도록 말이다. 한 쪽을 두둔하고 한 쪽을 편들면 중재는 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정의’를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미덕으로 갈 수 있는 처방을 내 놓아야 한다.
관리자는 규칙을 어겨가며 사랑을 하는 행위는 결코 사랑이라고 용납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그런 것을 알았더라면 그를 화나지 않도록 사전에 협조를 구했어야 한다. 어떤 상황인가를 알리고 규칙을 뛰어넘어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했어야 한다. 선생님들의 행위가 비록 사랑의 행위라 하지만, 공동체를 늘 살피는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규칙 위반은 결코 사랑이라 할 수가 없다. 규칙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행위가 진정한 사랑인가를 엄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혼자 산다면 정의, 법, 행복, 자유, 미덕 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공동체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덕을 지니며 살아가기를 바라기에 따지는 것이다. 규칙은 누구도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서로에게 최선의 삶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라고 마이클 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