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8)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99 | 작성일 : 2011년 1월 6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8)
사람들은 가는 해가 아쉬운 듯 일몰을 바라보며 허물 벗듯 한해를 정리하면서, 새해 아침이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복을 기원한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첫 탄생을 알리는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새해 첫 시간을 깨운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첫 내방객을 반갑게 맞이하며 축복을 빈다. 이렇게 신년 새해 아침이 기쁨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세상일을 한치 앞도 몰라 매일 긴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기만하면 안부를 묻고 서로 복을 빌어주고 행복을 염원하는 모양이다. 그런 고통과 죽음 사이에서 사람들은 생명의 기쁨을 만들고는 환호한다. 이런 기쁨은 인간만이 만드는 기적은 아니다. 모든 생명을 지닌 동식물도 극한점에서 생명을 만들고 있다. 밭에 심겨진 보리와 밀은 긴 엄동을 지나며 꽃눈을 만들고, 봄이 오면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고 우리에게 양식이 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모든 동식물들은 생과 사의 사이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기도하며, 생명의 한계점에 도전하며 기쁨을 만들어 낸다. 생명이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 사투를 벌리며 살아난 칠레의 광부들의 기적생환은, 살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피어낸 인간 승리의 본보기였다. 이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바꾸며 이룬 기적 이야기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작년과 새해 사이에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모든 이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고통을 반복하며 기쁨의 생명을 꽃피워 내야한다. 기쁨은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투를 벌려야 이루어지는 선물이다. 극한점에 서 이를 극복할 때 얻는 선물이 ‘기쁨’이다. 오랫동안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버린 생명체를 본다. 아차, 싶어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물을 흠뻑 주자, 잠시 후 생명체가 소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눈으로 보아 더 이상 생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의 위조점에 도달할 때 포기하지 않고 재빠르게 대처하며 살면, 그 생명은 이전보다 더 크게 성숙함을 본다. 내 자신이 한적한 외딴 곳에 홀로 서 있을 때 내 자신을 본다. 먹을 것이 더 이상 없어 보일 때, 그때 우리는 생명을 위해 일어선다. 추위에 잠자리가 없어 떨고 있을 때 일자리를 찾는다. 이렇게 자신의 불가능이란 극점에 서 있을 때 모든 생명은 시련을 견디어 내며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노력하는 생명에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은혜이고, 불가능에서 피어난 인간 승리요, 생명의 기적이다.
내가 학교 설립할 때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희망이 없을 때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사람을 찾아 나섰다. 홀로 외딴 터에서 막막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은 서로 통하고 생명이 되어주었다. 물론 지금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산적해 있다. 대법원에 계류 중인 학교 옆 채석장 허가 취소에 대한 상고도 그렇다. 끈질기게 삼 년을 끌어 왔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행정심판 제1심에서 승소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고법에서 패소했지만 말이다. 학생과 학교라는 생명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려 고통 중에 기쁨도 보았고, 또 다른 고통도 보며 다시 기쁨을 준비한다. 대법에서 바늘귀에 실을 정확히 꿰어 기쁨을 얻어내는 작업은 여전히 불가능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기쁨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일출을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복을 청하는 마음처럼 우리도 간절하다. 우리가 매어달린 문제의 극한점에서 생명이 푸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했고 복이 실제가 되도록 마땅한 그릇도 준비해야 했다.
고등법원에서의 일방적인 참패를 놓고 이 일을 접을 수가 없었다. 다시 동력을 만들어 낼 자금도 마련해야하지만 대법관을 움직일 사람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삼척동자에게 물어 보아도 공익을 우선해야할 결심이 자본주의 영향을 받았는지 졌다고 하면서도, 정작 일꾼들은 모두들 질 수밖에 없다며 수임을 꺼려했다. 공익과 서민을 우선하는 일꾼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극한점을 극복하기 위해 발 벗고 찾아나서야 했다. 지방 일을 갖고 서울에 가니 자본주의 시장이 어떻다는 것을 더 잘 보게 된다.
요즘 뉴스에서는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임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10%가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러면서 재벌총수가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소환되고 있음을 본다. 베풀지 않고 움켜잡기만 하는 이 나라가 여전히 부패나라이고 청렴치 못한 나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세상이 행복하려면 우리는 함께 겪는 한계점을 위해 일해야 한다. 한계점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기쁨의 준비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고급 자격증을 갖고 일하는 분들이 자신의 생명을 서민을 위해 내어 놓을 때, 극한점에 살아 있는 모두가 생명이 되어 참 기쁨을 누릴 것이다. 새해 아침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이가 내어주며 축복된 삶을 살았으면 한다.
사람들은 가는 해가 아쉬운 듯 일몰을 바라보며 허물 벗듯 한해를 정리하면서, 새해 아침이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고 복을 기원한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첫 탄생을 알리는 힘찬 아기 울음소리가 새해 첫 시간을 깨운다. 공항 입국장에서는 첫 내방객을 반갑게 맞이하며 축복을 빈다. 이렇게 신년 새해 아침이 기쁨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세상일을 한치 앞도 몰라 매일 긴장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나기만하면 안부를 묻고 서로 복을 빌어주고 행복을 염원하는 모양이다. 그런 고통과 죽음 사이에서 사람들은 생명의 기쁨을 만들고는 환호한다. 이런 기쁨은 인간만이 만드는 기적은 아니다. 모든 생명을 지닌 동식물도 극한점에서 생명을 만들고 있다. 밭에 심겨진 보리와 밀은 긴 엄동을 지나며 꽃눈을 만들고, 봄이 오면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고 우리에게 양식이 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모든 동식물들은 생과 사의 사이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기도하며, 생명의 한계점에 도전하며 기쁨을 만들어 낸다. 생명이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 사투를 벌리며 살아난 칠레의 광부들의 기적생환은, 살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피어낸 인간 승리의 본보기였다. 이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바꾸며 이룬 기적 이야기이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작년과 새해 사이에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모든 이가 각기 다른 분야에서 고통을 반복하며 기쁨의 생명을 꽃피워 내야한다. 기쁨은 그냥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투를 벌려야 이루어지는 선물이다. 극한점에 서 이를 극복할 때 얻는 선물이 ‘기쁨’이다. 오랫동안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버린 생명체를 본다. 아차, 싶어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물을 흠뻑 주자, 잠시 후 생명체가 소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눈으로 보아 더 이상 생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의 위조점에 도달할 때 포기하지 않고 재빠르게 대처하며 살면, 그 생명은 이전보다 더 크게 성숙함을 본다. 내 자신이 한적한 외딴 곳에 홀로 서 있을 때 내 자신을 본다. 먹을 것이 더 이상 없어 보일 때, 그때 우리는 생명을 위해 일어선다. 추위에 잠자리가 없어 떨고 있을 때 일자리를 찾는다. 이렇게 자신의 불가능이란 극점에 서 있을 때 모든 생명은 시련을 견디어 내며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노력하는 생명에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이며 은혜이고, 불가능에서 피어난 인간 승리요, 생명의 기적이다.
내가 학교 설립할 때도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희망이 없을 때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사람을 찾아 나섰다. 홀로 외딴 터에서 막막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은 서로 통하고 생명이 되어주었다. 물론 지금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산적해 있다. 대법원에 계류 중인 학교 옆 채석장 허가 취소에 대한 상고도 그렇다. 끈질기게 삼 년을 끌어 왔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행정심판 제1심에서 승소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록 고법에서 패소했지만 말이다. 학생과 학교라는 생명의 보금자리를 지켜내려 고통 중에 기쁨도 보았고, 또 다른 고통도 보며 다시 기쁨을 준비한다. 대법에서 바늘귀에 실을 정확히 꿰어 기쁨을 얻어내는 작업은 여전히 불가능처럼 보인다. 그렇더라도 기쁨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일출을 보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복을 청하는 마음처럼 우리도 간절하다. 우리가 매어달린 문제의 극한점에서 생명이 푸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했고 복이 실제가 되도록 마땅한 그릇도 준비해야 했다.
고등법원에서의 일방적인 참패를 놓고 이 일을 접을 수가 없었다. 다시 동력을 만들어 낼 자금도 마련해야하지만 대법관을 움직일 사람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삼척동자에게 물어 보아도 공익을 우선해야할 결심이 자본주의 영향을 받았는지 졌다고 하면서도, 정작 일꾼들은 모두들 질 수밖에 없다며 수임을 꺼려했다. 공익과 서민을 우선하는 일꾼을 찾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극한점을 극복하기 위해 발 벗고 찾아나서야 했다. 지방 일을 갖고 서울에 가니 자본주의 시장이 어떻다는 것을 더 잘 보게 된다.
요즘 뉴스에서는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임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10%가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러면서 재벌총수가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소환되고 있음을 본다. 베풀지 않고 움켜잡기만 하는 이 나라가 여전히 부패나라이고 청렴치 못한 나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진정으로 세상이 행복하려면 우리는 함께 겪는 한계점을 위해 일해야 한다. 한계점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기쁨의 준비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고급 자격증을 갖고 일하는 분들이 자신의 생명을 서민을 위해 내어 놓을 때, 극한점에 살아 있는 모두가 생명이 되어 참 기쁨을 누릴 것이다. 새해 아침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이가 내어주며 축복된 삶을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