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의 이야기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93 | 작성일 : 2011년 1월 29일
한 학생의 이야기
1998년 여름날, 내가 휴가를 떠난 곳은 ‘보길도’였다. 지금은 섬과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보길도에서 노화도로 가려면 연락선이 있어야 했다. 보길도 섬보다는 작은 노화도에 공소가 있었기에, 동생인 수녀와 함께 그 곳을 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공소이지만 꽤 신자들이 많았었다. 나는 학교를 막 설립하고 있었기에 주일강론은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학교의 설립 이유와 부적응 청소년들의 천국 학교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야심차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한 신자분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공소 문에 나타나 인사를 하는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10년이 지나 그 분이 아들과 함께 학교를 찾아왔다. 나는 금방 알아볼 정도로 기억이 생생했다. 2008년, 아들을 입학시키려 양업에 찾아 온 것이었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도 주님의 은총인가 보다.
그러나 아들을 입학시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했다. 공무원인 남편의 고정관념은 아들이 고향의 지역 고등학교를 다니기를 바랐고, 더구나 부정적인 인식으로 소문나 있는 우리학교에 아들을 입학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납이 되질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선생님인 아내의 생각은 우리학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 뿐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출장 간 시간을 틈타 아내가 일을 벌였다. 그렇게 아들은 양업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못 마땅한 표정으로 남편은 심기가 불편했을 테고 이미 벌어진 일이라 그 사정을 어찌하랴. 당시에 아들은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어 1학년을 중퇴한 상태였다. 친구들 간에 부적응의 이유도 있었을 테고, 부모는 대안을 찾았을 것이다.
입학한 후에 학생의 얼굴은 늘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는 가정의 보스로서 강압적이었고, 엄마는 아빠한테 쥐죽은 듯 순명해야만 했다고 들었다. 그 사이에 누나인 딸과 아들이 숨을 제대로 쉬었겠는가. 다행인 것이 딸은 순종형 아들과 달라서 아버지에게 반란자였다. 그 반란 덕분에 숨죽이는 가족들에게 조금은 숨통이 트이곤 했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이 입학을 하고 학부모는 의무적으로 행하는 학부모교육인 ME부부교육을 이수했다. 아마 부부 사이에 감동의 시간이었었던 것 같다. 부부는 놀랍게 변했고, 가정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보스의 아버지는 회심을 했고 자상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편은 ME홍보대사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ME정신을 소개하며 좋아라 했다. ‘부모가 변해야 자녀가 변한다.’는 말을 실제로 보여주는 예로, 가정은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들의 입학 덕분에 부모님도 행복한 부부로 변했고, 아들은 어두움을 벗고 교육과정을 통해 행복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들은 2학년 때, 부 학생회장으로, 3학년 때는 전체 학생회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반듯하게 성장하고 성숙해 갔다. 그런 변화의 모습을 지켜 본 누나가 어느 날 나에게 “우리 동생이 많이 밝아졌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학생이 2학년 말이었을까. 자신의 대학진학과 미래의 진로를 위해 나를 찾아왔다. “신부님, 저 성악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잘 했다. 목표가 있어야 하지, 네 소질이고 적성이라면 열심히 해보아라.” 작년 ‘성모의 밤’에 학생은 데뷔곡으로 ‘아베마리아’ 곡을 학생들에게 선사했고, 충분한 소질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때 노래하는 모습은 동료학생들과 선생님들도 놀랐다. 칭찬과 격려는 동기가 되고 2학년에서의 생활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학생의 리드로서 학생들의 좋은 모범으로 학생회를 이끌었다. 캄캄하던 얼굴에서 환한 얼굴로 학생이 변했고, 아빠, 엄마의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음악 수녀님의 지도와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 레슨을 받으며 진학준비를 했고 부모님의 기도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이 부모는 자기자녀만 생각하는 부모가 아니었다. 언제나 문제가 있을 때면 늘 학교를 생각했고, 마음에 새기며 기도했다. 얼마 전에 서울 가톨릭대 음대 성악부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때 학생의 합격 소식은 하늘로 비상하듯 기쁨이 느껴졌다. 나도, 선생님들도 무척 기뻤다. 이 학생의 아버지가 “지역 고등학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 지금껏 주눅이 들었을 엄마도 이제는 자유스러워졌으리라. 며칠 뒤 “신부님, 저 중앙대 예술학부 성악과에 합격했어요.” 이쯤 되면 학생은 성공한 셈이다. 학생의 소질이 성악이고 예술학부에서 공부하다보면 연극영화, 오페라와 연결되고, 외국 유학에서 잘 다듬으면 대한민국의 빛나는 성악가로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참 기분 좋은 소식처럼 학생에게도, 학교에게도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부모가 3년 내내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이룬 가족들의 훈훈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1998년 여름날, 내가 휴가를 떠난 곳은 ‘보길도’였다. 지금은 섬과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보길도에서 노화도로 가려면 연락선이 있어야 했다. 보길도 섬보다는 작은 노화도에 공소가 있었기에, 동생인 수녀와 함께 그 곳을 찾았다. 지금도 여전히 공소이지만 꽤 신자들이 많았었다. 나는 학교를 막 설립하고 있었기에 주일강론은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학교의 설립 이유와 부적응 청소년들의 천국 학교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야심차게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한 신자분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공소 문에 나타나 인사를 하는데, 인연이 되려고 그랬던지 10년이 지나 그 분이 아들과 함께 학교를 찾아왔다. 나는 금방 알아볼 정도로 기억이 생생했다. 2008년, 아들을 입학시키려 양업에 찾아 온 것이었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도 주님의 은총인가 보다.
그러나 아들을 입학시키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했다. 공무원인 남편의 고정관념은 아들이 고향의 지역 고등학교를 다니기를 바랐고, 더구나 부정적인 인식으로 소문나 있는 우리학교에 아들을 입학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납이 되질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선생님인 아내의 생각은 우리학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 뿐이었다고 한다. 남편이 출장 간 시간을 틈타 아내가 일을 벌였다. 그렇게 아들은 양업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못 마땅한 표정으로 남편은 심기가 불편했을 테고 이미 벌어진 일이라 그 사정을 어찌하랴. 당시에 아들은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어 1학년을 중퇴한 상태였다. 친구들 간에 부적응의 이유도 있었을 테고, 부모는 대안을 찾았을 것이다.
입학한 후에 학생의 얼굴은 늘 어두워 보였다. 아버지는 가정의 보스로서 강압적이었고, 엄마는 아빠한테 쥐죽은 듯 순명해야만 했다고 들었다. 그 사이에 누나인 딸과 아들이 숨을 제대로 쉬었겠는가. 다행인 것이 딸은 순종형 아들과 달라서 아버지에게 반란자였다. 그 반란 덕분에 숨죽이는 가족들에게 조금은 숨통이 트이곤 했다는 것이었다. 이 학생이 입학을 하고 학부모는 의무적으로 행하는 학부모교육인 ME부부교육을 이수했다. 아마 부부 사이에 감동의 시간이었었던 것 같다. 부부는 놀랍게 변했고, 가정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보스의 아버지는 회심을 했고 자상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다시 태어났다. 남편은 ME홍보대사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ME정신을 소개하며 좋아라 했다. ‘부모가 변해야 자녀가 변한다.’는 말을 실제로 보여주는 예로, 가정은 놀라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들의 입학 덕분에 부모님도 행복한 부부로 변했고, 아들은 어두움을 벗고 교육과정을 통해 행복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들은 2학년 때, 부 학생회장으로, 3학년 때는 전체 학생회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반듯하게 성장하고 성숙해 갔다. 그런 변화의 모습을 지켜 본 누나가 어느 날 나에게 “우리 동생이 많이 밝아졌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학생이 2학년 말이었을까. 자신의 대학진학과 미래의 진로를 위해 나를 찾아왔다. “신부님, 저 성악을 전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잘 했다. 목표가 있어야 하지, 네 소질이고 적성이라면 열심히 해보아라.” 작년 ‘성모의 밤’에 학생은 데뷔곡으로 ‘아베마리아’ 곡을 학생들에게 선사했고, 충분한 소질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때 노래하는 모습은 동료학생들과 선생님들도 놀랐다. 칭찬과 격려는 동기가 되고 2학년에서의 생활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학생의 리드로서 학생들의 좋은 모범으로 학생회를 이끌었다. 캄캄하던 얼굴에서 환한 얼굴로 학생이 변했고, 아빠, 엄마의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음악 수녀님의 지도와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 레슨을 받으며 진학준비를 했고 부모님의 기도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이 부모는 자기자녀만 생각하는 부모가 아니었다. 언제나 문제가 있을 때면 늘 학교를 생각했고, 마음에 새기며 기도했다. 얼마 전에 서울 가톨릭대 음대 성악부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때 학생의 합격 소식은 하늘로 비상하듯 기쁨이 느껴졌다. 나도, 선생님들도 무척 기뻤다. 이 학생의 아버지가 “지역 고등학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에 지금껏 주눅이 들었을 엄마도 이제는 자유스러워졌으리라. 며칠 뒤 “신부님, 저 중앙대 예술학부 성악과에 합격했어요.” 이쯤 되면 학생은 성공한 셈이다. 학생의 소질이 성악이고 예술학부에서 공부하다보면 연극영화, 오페라와 연결되고, 외국 유학에서 잘 다듬으면 대한민국의 빛나는 성악가로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참 기분 좋은 소식처럼 학생에게도, 학교에게도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부모가 3년 내내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이룬 가족들의 훈훈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