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숙 마리 가밀라 수녀님의 은경축일에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5,506 | 작성일 : 2011년 10월 2일

                      김경숙 마리 가밀라 수녀님 은경축일에

 “나를 따라라.”(루카9,59)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루카9,62)가 아닌 올곧게 하느님을 향해 살아 온 수도자의 길, 25년!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며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 온 수녀님에게는 오늘이 더 없이 기쁜 날이다. 그럼으로 함께 사는 양업가족은 수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며, 은총과 축복으로의 삶으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감사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던 시절, 신앙의 불모지 가정에서 혼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의 기쁨도 잠시 뿐, 교적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놀기 좋아하고 세상보기를 좋아한 탓에 주일미사도 잊은 채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고 했다. 첫 고백도 못하고 내리 삼년을 지내던 어느 날인가, 하느님께서 그를 다시 불러주시려는지 그의 손에는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이 들려져 있었다. 결혼 시기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 ‘하느님을 향해 결혼을 포기한 삶’이란 글을 대할 때는, ‘아, 우리가 결혼 하지 않고도 또 다른 행복한 삶이 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인생길을 펴리라는 결심으로 냉담을 풀기로 작정했단다.
  고해성사를 보는 방법도 모른 채 성사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고해소 문을 연 수녀님은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죄가 없다.”고 짤막하게 답변을 했단다. 줄잡아 3년을 냉담하고도 죄가 없다고 했으니, 고해신부가 왜 야단을 치지 않겠는가. 그 야단이 청천벽력처럼 얼마나 무서웠던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고 했다. 신앙생활이 막 시작된 새싹의 시절, 이런 일은 어린 신앙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참에 아예 신앙을 접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쫓겨 나오듯 고해소를 나온 수녀님은 오기로 2개월을 지냈단다. 그런 그의 심기가 더욱 불편했다고 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고해소를 찾기로 마음먹고 고해방법도 제대로 익혀, 처음과 다르게 양심성찰을 잘 해서 고해소를 찾았단다. 호령하던 신부님께 두 달 전 상황을 말씀드리고, 용기를 내어 찾아 왔노라고 이실직고를 하고 나서 잘못을 고백하자, 신부님은 그랬었느냐고 말하고는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하며, 예전과 달리 아주 사랑스럽고 자상하게 대해주셨다는 것이다. 수녀님은 편안한 마음으로 고해소를 나왔는데, 그 순간, 하늘을 향한 기쁨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했다고 했다. 이 일이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진 전환점이 될줄이야.
 그는 그 일이 있은 후에 ‘하느님을 향해 결혼을 포기한 삶’을 결심하고, 놀고 세상을 살피던 일상적인 습관과 자기가 전공했던 간호사의 직무도 버리기로 결심하고 즐겁게 수도회 입회했다. 모든 것을 다 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수도자로 품격을 높여주셨고, 버린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을 되돌려 주시며 풍성히 축복해주셨다고 회고한다. 그가 수도자가 되어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복지사로 거듭나 가난한 사람들과 12년을 살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자.”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찾아간 곳이 대안학교인 ‘양업고’였다. 그리고 이제 13년을 맞이하고 있다. 1기 입학자들이 졸업할 즈음 부임했기에 수녀님이 학교설립의 창업 멤버라 할 수 있겠다.
 그는 학생들의 보건교사로 밤낮으로 학생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간호한 사랑의 어머니였다. 또한 사회복지 중 교육복지를 실현하며 학교교육의 질을 높였고, 인성교과 프로그램의 계발 및 편성과 운영을 하면서 교육의 평가와 질적인 향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수녀님은 풍부한 아이디어 뱅크로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학교를 발전시키는 주역으로 일하고 있다. 하느님과 살아오면서 보여준 수도자의 영성은 사랑과 봉사, 희생적 교직관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 학생들이 ‘스승의 날’ 교사들에게 주는 상에 그가 받은 상은, 나이팅게일 상, 마더 테레사 상, 우리들의 어머니 상 등 남달랐고, 그가 학생들이 창단한 레지오에 꼬박꼬박 참여하여 간식도 챙겨주자, 학생들은 ‘간식조달 상, 영적지도 꼬박 상’이었다.
 13년 전, 수녀님이 복잡한 도심의 생활을 접고, 산골학교를 찾았을 때의 첫 소감은, 한마디로 썰렁했다고 했다. 칠흑같이 캄캄한 별밤이 아름답다기보다 차갑고 냉랭했던 것은, 학교가 초장기였기에 다들 여유가 없어 아무도 따뜻하게 맞이해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썰렁한 학교의 첫 인상이 3년 내내 한 번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묶고 지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3년이 지나자, 학교에 역동적인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정감 넘치는 학생들도 보기 시작했단다. 그들의 생기나는 모습을 보자 수녀님도 본 마음이 동했는지, 학교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야, 비행기다."하며 세상보기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단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로 산으로, 또한 중국, 일본 이동수업은 수녀님의 학교에 대한 냉랭한 마음을 풀기 시작해서 13년을 매우 즐겁게 기쁘게 산 결과, 지금은 호주, 뉴지랜드, 필리핀, 유럽의 각국과 스페인 마드리드며, 네팔, 중국, 등  글로벌 시대를 사는 수도자가 되어 있다.  이제 그 어느 곳보다 천국이 학교란다. 다른 어느 곳도 생각에 없다한다.
 오늘 수녀님의 은경축에 우리 전 교직원과 학생들, 학부모들이 한마음이 되어 축하를 드리고 있다. 수녀님을 보면 언제나 맑고 항상 밝게 웃는 여유로운 성품이 늘 행복하다. 미사가 끝나고 꽃다발 품에 안고 활짝 웃어 보이는 수녀님이 그동안의 삶을 잘 말해주고 있다. 수녀님! 주님과 함께한 25년의 시간들을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50주년을 향해 또 새로운 첫발을 떼십시오.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