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고 있는냐?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760 | 작성일 : 2012년 3월 31일

아직도 자고 있느냐

 봄이 오면 자연의 생명처럼, 우리들의 생명도 예쁘게 자라났으면 좋겠다. 여름이 오면 싱싱하게 피어나는 자연의 생명처럼, 우리들의 생명도 푸르렀으면 좋겠다. 가을이 오면, 아름다운 자연의 생명처럼 우리들 생명도 곱게 물든 단풍잎이 되었으면 좋겠다. 청춘을 살며 풋풋한 생명으로 푸름을 자랑하며 살자. 그러기 위해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더 큰 생명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왜 자고 있느냐.”(루카22.46), “아직도 자고 있느냐?”(마태26.45) 이는 수난예고의 쓴 잔을 마실 준비를 하는 예수님께서 잠에 취해 있는 수제자 베드로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학생들에게 이 성경구절을 자주 들려준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느라 마음이 너무 산란하여 괴롭고 죽을 지경인데,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 채,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에 취해 있었다. 아마도 제자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든든함 때문인지 미구에 한 몫을 한껏 챙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는 현실감이 전혀 없고, 그 상황이 현실이 아니길 바랐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삶이라는 전쟁터로 향하며 긴장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철없는 자녀들은 그 일을 알리가 없다. 아버지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긴장하며 일터로 향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춥고 눈 오는 날에 홀로 들판에 서있는 것처럼 고독을 느끼기도 하고, 상사에게서 질책을 받을 때면,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처럼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피곤해서 집에 돌아 올 때면, 시큰둥한 아내와 자식들의 표정에서 존중과 사랑을 받지 못해 버림받았을 때처럼 서글픈 느낌도 하고, 회사 일을 위해 죽어라 열심히 일했지만 승진은 못하고 탈락했을 때처럼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 아버지에게 이런 속내가 있지만 오르지 가족의 생명을 위해서 묵묵히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갈 뿐이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거는 기대는 자녀의 성숙한 미래를 보고 싶어 할 뿐인데 철부지는 깨어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잠에 취한 철부지 자녀를 볼 때면, 시험 때 TV 앞에 앉아있는 아이를 볼 때처럼 울화가 치밀고 화가 날 것이다.
 자녀의 변화는 부모의 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때이다. 학생들이 철드는 결정적 변인은 부모의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 올 때쯤이라 여겨진다. 자녀들이여, 오늘은 부모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길 바란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잠에서 깨어나라. 파격(破格)에서 격은 틀이다. 젊은이들이 늘상 반복하는 고정의 틀을 깬다면 그때부터 세상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도록 깨어나야 한다. 양업의 학교는 좋은 생각과 좋은 체험을 통하여 긍정적인 변인을 이끌어 낼 수가 있도록 돕는 학교이다. 큰 사람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게 하고, 미래의 목표를 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큰 인재의 꿈을 실현해 가는 사람이다. 학생들이여 잠에서 깨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