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삶으로의 방향회전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61 | 작성일 : 2010년 3월 10일
본질적인 삶으로의 방향회전
사람은 철들자 죽는다고, 일을 끝내야 비로소 본질을 이야기하게 되니 그만큼 사람 되기가 힘든가 보다.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직무를 떠나면서 철이 드는 것 같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제는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직무에 좀 더 충실하게 살 걸”이라는 표현에서 때늦은 후회스러움이 묻어난다. 정년 할 즈음에서야 자신의 직무를 후회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면서 무게 있는 철든 소리를 한다. 매년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퇴임의 변을 읽는다. 떠남이 아쉬운 듯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선다면”으로 시작하는 회고사는 철이 덜 든 가정법을 쓰기도 한다. 이제 어른이라면 자기 생에 대해서는 가정법은 써서는 안 된다. 이는 미사여구도 아니며 의미 있는 수식어도 아닐 것이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분주히 자신의 일과 승급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처음처럼’이라는 시작의 각오를 퇴임의 자리에서 비로소 확인했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해야할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직무를 마친 끝자락에서 돌아 본 자신의 자리는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분명 겸손도 아니다. 이제 무게 있던 출근 자리가 없어지고 함께 지낼 사람도 별로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직무에 대한 일감이 아니라 자기 남은 생을 행복하게 만들 일감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빈 털털이가 되었을 때 또 다른 것을 찾게 된다. 그 일감은 '일'이 아니라 '관계'라는 본질로 돌아와 자신을 살펴보는 일이다. 자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었음을, 이웃을 위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돌아 본적이 없었음을 알고 그 안에서 본질적인 일감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본질적인 삶인데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지냈다. 본질적인 삶으로의 방향 회전 이것이 ‘회개’가 아닐까 여겨진다. 사람이 살아가며 정신이 바짝 드는 때가 있다. 모든 일을 자기 손에서 내려놓으라는 신호를 받을 때이다. 그 때 사람들은 놀란다. 더구나 1등만을 위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질문이 ‘이제 뭐하지?’였다. 진정한 무엇을 하려하는 마음의 전환,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가 싶다.
건강하던 친구가 암 판정을 받고는 한 인생이 무너졌다. 암병동에서 조금 전에 내 옆에 있었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 찾아보니 병원 옥상에 올라 독백처럼 자기를 원망하며 절규하는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들은 건강히 잘 사는데 바보같이 너는 이게 뭐야!” 자기를 2인칭화하여 욕을 해 붙이고 있었다. 그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친구는 “내가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고 가정법을 썼다. 그제야 그는 일생에 한번 자기 위치를 확인했지만 그는 무대책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얼마 살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또 다른 한 친구가 있었다. 암 판정 소식을 듣는 순간 그 친구도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순간 생명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가정법을 생각해 내지 않았다. 그 때부터 그는 인생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물음을 꺼내 들었다. 한 번도 생각지 않던 철학적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낳는가?’ 그런 질문이 늘 그 친구의 생애 안에 있었다. 그 환자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그래도 인생의 궁극적 목적 정도는 알고 지내는 신앙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생명구원을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찾아 전전하다 죽었을 텐데 그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마운 생을 살았던가?’ 하며 정년 후에 이웃을 위해 하느님을 향해 더 싱싱한 날개를 달기로 결심했다.
이제 건강하게 정년을 했으니 지금부터 덤으로 주어지는 시간 지금부터라도 일에 쫓겨 하지 못했던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야겠다. 사랑하지 못하고 지낸 사람을 사랑해야겠다. 그는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그 친구가 지상에서 마지막 잎새가 되어 떨어지는 날, 나는 그 친구를 위해 고별미사를 해주었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무엇이라도 다 해야겠다” 라며 끝가지 하느님을 향하여 생을 불태운 친구가 지금도 그립다.
나는 신앙의 자리에서 날마다 듣고 지내던 ‘회개’가 무엇인가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
ㅆ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에게 진정한 ‘회개의 삶’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가르쳐 주고 떠났다. 삶의 마지막까지 신앙인으로 살며 못 다한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 준 그는 하느님을 향한 행복의 삶으로 매듭하게 된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카13.5)
사람은 철들자 죽는다고, 일을 끝내야 비로소 본질을 이야기하게 되니 그만큼 사람 되기가 힘든가 보다. 사람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 직무를 떠나면서 철이 드는 것 같다.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이제는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직무에 좀 더 충실하게 살 걸”이라는 표현에서 때늦은 후회스러움이 묻어난다. 정년 할 즈음에서야 자신의 직무를 후회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면서 무게 있는 철든 소리를 한다. 매년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퇴임의 변을 읽는다. 떠남이 아쉬운 듯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선다면”으로 시작하는 회고사는 철이 덜 든 가정법을 쓰기도 한다. 이제 어른이라면 자기 생에 대해서는 가정법은 써서는 안 된다. 이는 미사여구도 아니며 의미 있는 수식어도 아닐 것이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분주히 자신의 일과 승급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처음처럼’이라는 시작의 각오를 퇴임의 자리에서 비로소 확인했을 것이다. 새롭게 시작해야할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직무를 마친 끝자락에서 돌아 본 자신의 자리는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분명 겸손도 아니다. 이제 무게 있던 출근 자리가 없어지고 함께 지낼 사람도 별로 없음을 깨닫는다. 이제 직무에 대한 일감이 아니라 자기 남은 생을 행복하게 만들 일감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빈 털털이가 되었을 때 또 다른 것을 찾게 된다. 그 일감은 '일'이 아니라 '관계'라는 본질로 돌아와 자신을 살펴보는 일이다. 자신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었음을, 이웃을 위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돌아 본적이 없었음을 알고 그 안에서 본질적인 일감을 찾아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본질적인 삶인데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고 지냈다. 본질적인 삶으로의 방향 회전 이것이 ‘회개’가 아닐까 여겨진다. 사람이 살아가며 정신이 바짝 드는 때가 있다. 모든 일을 자기 손에서 내려놓으라는 신호를 받을 때이다. 그 때 사람들은 놀란다. 더구나 1등만을 위하여 살아온 사람들의 질문이 ‘이제 뭐하지?’였다. 진정한 무엇을 하려하는 마음의 전환,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가 싶다.
건강하던 친구가 암 판정을 받고는 한 인생이 무너졌다. 암병동에서 조금 전에 내 옆에 있었는데 어디로 간 것일까? 찾아보니 병원 옥상에 올라 독백처럼 자기를 원망하며 절규하는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들은 건강히 잘 사는데 바보같이 너는 이게 뭐야!” 자기를 2인칭화하여 욕을 해 붙이고 있었다. 그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친구는 “내가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고 가정법을 썼다. 그제야 그는 일생에 한번 자기 위치를 확인했지만 그는 무대책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얼마 살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또 다른 한 친구가 있었다. 암 판정 소식을 듣는 순간 그 친구도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순간 생명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가정법을 생각해 내지 않았다. 그 때부터 그는 인생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물음을 꺼내 들었다. 한 번도 생각지 않던 철학적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낳는가?’ 그런 질문이 늘 그 친구의 생애 안에 있었다. 그 환자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그래도 인생의 궁극적 목적 정도는 알고 지내는 신앙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생명구원을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찾아 전전하다 죽었을 텐데 그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마운 생을 살았던가?’ 하며 정년 후에 이웃을 위해 하느님을 향해 더 싱싱한 날개를 달기로 결심했다.
이제 건강하게 정년을 했으니 지금부터 덤으로 주어지는 시간 지금부터라도 일에 쫓겨 하지 못했던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야겠다. 사랑하지 못하고 지낸 사람을 사랑해야겠다. 그는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그 친구가 지상에서 마지막 잎새가 되어 떨어지는 날, 나는 그 친구를 위해 고별미사를 해주었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무엇이라도 다 해야겠다” 라며 끝가지 하느님을 향하여 생을 불태운 친구가 지금도 그립다.
나는 신앙의 자리에서 날마다 듣고 지내던 ‘회개’가 무엇인가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
ㅆ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에게 진정한 ‘회개의 삶’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가르쳐 주고 떠났다. 삶의 마지막까지 신앙인으로 살며 못 다한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 준 그는 하느님을 향한 행복의 삶으로 매듭하게 된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카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