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방해하는 살기 바빠서라는말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068 | 작성일 : 2010년 8월 23일
소통을 방해하는 ‘살기 바빠서’라는 말
가톨릭 청주교구를 젊은 교구라고 자랑했는데, 어느새 교구도 제법 연륜이 쌓이고 은퇴신부님들도 생겨났다. 교구가 젊었을 시절,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신부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신부님 곁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오다리 신부님’도 생각났다. 교구의 신부님들 중에 암과 투병하는 신부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신부님들을 신부들 사이에서 ‘오다리 신부님’라고 불렀다. 물론 다른 신부님들의 정성도 갸륵했지만 ‘오다리 신부님’의 희생봉사를 당해 낼 신부님이 없었다. 선배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그동안의 돌봄이 ‘오다리 신부’의 손을 굳게 잡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담까지 하시며 행복한 이별을 했다고 들었다.
얼마 전, 아름다운 생을 사시고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내 어머님의 장례 기간, 푹푹 찌는 무더위에 장례식장에서 꼬박 지내서인지 세균 감염으로 후두염이 걸려 호흡이 곤란할 정도가 되어 병원신세를 졌다. 내가 입원한 방 바로 옆방에는 원로 은퇴 신부님이 지병으로 입원하고 계셨다. 지난 겨울이었을까, 그 신부님이 서울에 입원하고 계실 때 나는 의례적으로 빼꼼 병문안했던 것이 전부였다. 나는 단 한 번 방문하고는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위안을 삼고 지내는 터였다. 그리고 훌쩍 8개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나는 후두염에 걸려 신부님을 만나는 자리가 편치 못해 얼굴이 붉어졌다.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죄를 지은 듯, 그래서 만나기 싫은 만남이 숙명처럼 신부님 계신 옆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부님은 그동안 척추 수술을 했고, 건강이 제법 좋아질 무렵, 이번에는 고관절 수술을 했다. 그런데 고관절 수술을 하는 동안 세균에 감염되어 세균성 고관절염으로 오래도록 침상에서만 지내셨다. 옆방에서 있으려니 자연히 병실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께도 또 다른 ‘오다리 신부님’(현재 병원 원목 신부님)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신부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쉼 없이 다리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있던 나도 감화되어 거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긴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신부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는 신부님에게 “신부님! 얼굴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긴 투병생활에도 어쩌면 그렇게 얼굴이 평화스러우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답을 주셨다.
“내가 척추 수술에 고관절 수술을 하고는 8개월이 지나고 있지. 내가 투병 생활 동안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교구신부들을 내방객들에게 투정부리듯 많이 원망했어. ‘어떻게 신부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아무리 살기 바빠도 신부들이 이렇게도 냉랭할까?’ 하며 원망을 많이 하며 지냈네. 후배 신부들에 불만이 늘어나고 미움이 생겨나고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겠더라고. 어쩌면 이런 생각 덕분에 내가 마음을 바꾸는 은총을 입을 수 있게 되었지.
내가 겪는 장애의 고통이 교구 신부들 건강을 위할 수 있는 희생이 된다면, 내가 당연히 이 고통쯤 내 몫으로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인류 구원을 위해 이루는 고통을 알고 지내는 우리들인데, 나도 예수님을 닮아 교구 사제들의 건강을 위해 내 고통을 내 몫으로 잘 받아드리기로 했어. 그랬더니 내 얼굴이 자연히 밝아지기 시작했다네.”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 생각도 바뀌면서 나의 신부님에 대한 죄스러움도 사라지며 신부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어느 새 나도, 신부님도 동료 사제라는 일치감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일상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여, 서로 간의 소통의 장애를 쌓고 멀리 헤어져 있음을 본다. 갑자기 그 옛날 세상을 떠난 신부님을 정성껏 돌보던 ‘오다리 신부님’을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느닷없이 “‘오다리’란 뜻이 뭐야!” 그 신부님은 한바탕 웃어 보이며 나에게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병원에서 속어처럼 불리는 ‘오다리’란 단어는 사전에도 없지만, 추측하건데 외래어 사투리로 병자들을 돌보는 간병인보다 더 힘들고 험한 일들을 골라 하는 병원 도우미를 뜻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오다리 신부님’과 같은 그런 사랑은 힘들더라도 형제들 안에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가 서로들 사이에 넘쳐났으면 한다. 그 사랑의 실천은 ‘살기 바빠서’ 라는 말로 서로를 갈라놓는 소통의 장애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살기 바쁠지라도 지금, 즉시, 당장, 고통을 겪는 분들을 찾아가 고통을 상쇄할 구체적인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후배들이 건강하도록 고통으로 희생의 몫을 사신다는 아름다운 마음의 은퇴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은퇴신부님의 마음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것처럼 바쁘게 사목하는 후배 신부들이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가 아닌 마음도 여유를 갖고 은퇴신부님들을 방문하고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겠다.
가톨릭 청주교구를 젊은 교구라고 자랑했는데, 어느새 교구도 제법 연륜이 쌓이고 은퇴신부님들도 생겨났다. 교구가 젊었을 시절,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신부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신부님 곁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오다리 신부님’도 생각났다. 교구의 신부님들 중에 암과 투병하는 신부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신부님들을 신부들 사이에서 ‘오다리 신부님’라고 불렀다. 물론 다른 신부님들의 정성도 갸륵했지만 ‘오다리 신부님’의 희생봉사를 당해 낼 신부님이 없었다. 선배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 그동안의 돌봄이 ‘오다리 신부’의 손을 굳게 잡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농담까지 하시며 행복한 이별을 했다고 들었다.
얼마 전, 아름다운 생을 사시고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내 어머님의 장례 기간, 푹푹 찌는 무더위에 장례식장에서 꼬박 지내서인지 세균 감염으로 후두염이 걸려 호흡이 곤란할 정도가 되어 병원신세를 졌다. 내가 입원한 방 바로 옆방에는 원로 은퇴 신부님이 지병으로 입원하고 계셨다. 지난 겨울이었을까, 그 신부님이 서울에 입원하고 계실 때 나는 의례적으로 빼꼼 병문안했던 것이 전부였다. 나는 단 한 번 방문하고는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위안을 삼고 지내는 터였다. 그리고 훌쩍 8개월이 지난 지금, 우연히 나는 후두염에 걸려 신부님을 만나는 자리가 편치 못해 얼굴이 붉어졌다.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죄를 지은 듯, 그래서 만나기 싫은 만남이 숙명처럼 신부님 계신 옆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부님은 그동안 척추 수술을 했고, 건강이 제법 좋아질 무렵, 이번에는 고관절 수술을 했다. 그런데 고관절 수술을 하는 동안 세균에 감염되어 세균성 고관절염으로 오래도록 침상에서만 지내셨다. 옆방에서 있으려니 자연히 병실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께도 또 다른 ‘오다리 신부님’(현재 병원 원목 신부님)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신부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쉼 없이 다리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있던 나도 감화되어 거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긴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신부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나는 신부님에게 “신부님! 얼굴이 참 평화롭습니다. 그 긴 투병생활에도 어쩌면 그렇게 얼굴이 평화스러우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답을 주셨다.
“내가 척추 수술에 고관절 수술을 하고는 8개월이 지나고 있지. 내가 투병 생활 동안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교구신부들을 내방객들에게 투정부리듯 많이 원망했어. ‘어떻게 신부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아무리 살기 바빠도 신부들이 이렇게도 냉랭할까?’ 하며 원망을 많이 하며 지냈네. 후배 신부들에 불만이 늘어나고 미움이 생겨나고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리겠더라고. 어쩌면 이런 생각 덕분에 내가 마음을 바꾸는 은총을 입을 수 있게 되었지.
내가 겪는 장애의 고통이 교구 신부들 건강을 위할 수 있는 희생이 된다면, 내가 당연히 이 고통쯤 내 몫으로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인류 구원을 위해 이루는 고통을 알고 지내는 우리들인데, 나도 예수님을 닮아 교구 사제들의 건강을 위해 내 고통을 내 몫으로 잘 받아드리기로 했어. 그랬더니 내 얼굴이 자연히 밝아지기 시작했다네.”
나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내 생각도 바뀌면서 나의 신부님에 대한 죄스러움도 사라지며 신부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피어올랐다. 어느 새 나도, 신부님도 동료 사제라는 일치감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일상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하여, 서로 간의 소통의 장애를 쌓고 멀리 헤어져 있음을 본다. 갑자기 그 옛날 세상을 떠난 신부님을 정성껏 돌보던 ‘오다리 신부님’을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느닷없이 “‘오다리’란 뜻이 뭐야!” 그 신부님은 한바탕 웃어 보이며 나에게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병원에서 속어처럼 불리는 ‘오다리’란 단어는 사전에도 없지만, 추측하건데 외래어 사투리로 병자들을 돌보는 간병인보다 더 힘들고 험한 일들을 골라 하는 병원 도우미를 뜻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오다리 신부님’과 같은 그런 사랑은 힘들더라도 형제들 안에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가 서로들 사이에 넘쳐났으면 한다. 그 사랑의 실천은 ‘살기 바빠서’ 라는 말로 서로를 갈라놓는 소통의 장애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살기 바쁠지라도 지금, 즉시, 당장, 고통을 겪는 분들을 찾아가 고통을 상쇄할 구체적인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후배들이 건강하도록 고통으로 희생의 몫을 사신다는 아름다운 마음의 은퇴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은퇴신부님의 마음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것처럼 바쁘게 사목하는 후배 신부들이 살기 바빠서라는 핑계가 아닌 마음도 여유를 갖고 은퇴신부님들을 방문하고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