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379 | 작성일 : 2010년 8월 23일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호칭, 어머니! 나는 이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의 일상기도는 손 지문이 다 닳을 때까지 성모송을 읊으며 드리는 묵주의 기도였다. 성모송의 후반부인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부분은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설 때, 그 분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선종의 은혜를 달라는 기도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드리던 성모송 덕분에 어머니는 성모님의 전구로 선종을 맞이했다.
‘선종’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가 신앙인답게 영적 성숙을 이루고 맞이하는 죽음을 말하며, 둘째는 장수하다가 자연적으로 생명이 다해 건강한 죽음을 맞이할 때를 선종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집을 아니 지어주시면 그 수고가 헛되리이다.”(시편 127,1)라는 말씀처럼, 어머니는 이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사신 분이셨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어머니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집을 마련해 주셨고 선종을 허락하신 것이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3일 전,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미사를 봉헌하며 90회 생신 미사를 가졌고, 먼 곳에 사시는 외숙부 가족이 한자리에서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었다. 그 날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셨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아침, 3일 전의 가족모임으로 어머니께서 무척 피곤하실 거라는 생각에 전화로 아침 문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잘 있다고 자상하게 답해 주셨다.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는 점심식사 맛있게 드시고 수박 후식을 드신 다음 쉬어야겠다고 잠을 청하시며,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두 딸을 불러 모으시고 편안히 잠자듯 임종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딸은 오히려 당황하지 않고 편안했다고 한다. 두 딸이 병자성사를 받고 임종을 지켜보며 어머니 귓가에 속삭이던 말은, “어머니,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였다.
어머니는 암흑의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고, 숱한 고생의 세월을 보내셨다. 당시의 그 흔한 이름이 아닌 ‘영희’라는 어머니 이름은 자녀들에게 늘 자랑스러웠다. 외조부님이 붙여준 신식 이름은 세상 속에 훌륭함으로 빛났다. 어머니는 처녀시절,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 프랑스 신부님으로부터 그 어려운 교리를 단숨에 익혀 '카타리나'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선생으로 공직에 임용될 때도 하느님께서 도우셨다. 어머니는 윤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셔서 우리 집안을 업그레이드를 시켜주신 큰 은인이셨다. 어머니는 육남매 낳아 주시고, 5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70년대 초에 홀로 육남매를 대학까지 교육을 시키셨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겪은 여러 고통들을 어머니의 신앙 탓으로 돌리며 극복하셨다.
40년 전, 아버지께서 “애들아, 어머니 잘 모시고 어머니 신앙을 이어받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하시던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유언을 하실 만큼 아버지도 신앙인이 되셨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도 영적인 큰 은인이셨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의 삶의 여정은 고해였다. 그 고해를 극복하려고 신앙으로 삶을 이루신 어머니, 어머니가 간직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 생명이 되어 풍요롭게 성장했다. 아들, 딸들을 훌륭한 신자로 사제와 수도자로 길러주신 어머님이 선종을 이루시고, 우리도 하느님의 생명을 담고 살도록 하셨다. 어머니는 늘 힘드실 땐 성당에 있으셨다. 성체조배, 미사참례. 교회 봉사 활동과 교육, 그리고 본당 신부님들을 도와 교회의 어머니로서 지내셨다. 일생동안 89명을 영세 입교시키셨다. 어머니의 대녀들이 찾아와 연도를 하는 모습은 어머니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살다가 하느님의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의 선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양업학교’를 한다고 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참 좋은 일이다. 기도하마.”하시며 기도로 함께 해주셨다.
세상을 떠나시던 날, 공경하올 주교님과 동창 신부, 교구 사제단과 성당을 꽉 메워주신 수녀님들과 신자 분들과 장례미사를 봉헌하며 성가대의 성가 소리는 아름다운 천상을 보는 듯 했다. 고별식에서의 아들 신부가 행한 어머님을 향한 분향은 함께하는 모든 분들의 기도와 합해져서 하느님께 올려 질 것이라 믿는다. ‘통공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는 이제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 덕분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정이 한 마음으로 피어난다. 어머니의 기도를 보답하려는 듯 양업고의 1기부터 10기까지의 졸업생들 학부모님, 졸업생들의 조문이 길게 이어졌다. 또한 재학생 학부모님과 재학생들도…. 모든 분들의 조문에 감사하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소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호칭, 어머니! 나는 이제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의 일상기도는 손 지문이 다 닳을 때까지 성모송을 읊으며 드리는 묵주의 기도였다. 성모송의 후반부인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부분은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설 때, 그 분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선종의 은혜를 달라는 기도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열심히 드리던 성모송 덕분에 어머니는 성모님의 전구로 선종을 맞이했다.
‘선종’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가 신앙인답게 영적 성숙을 이루고 맞이하는 죽음을 말하며, 둘째는 장수하다가 자연적으로 생명이 다해 건강한 죽음을 맞이할 때를 선종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집을 아니 지어주시면 그 수고가 헛되리이다.”(시편 127,1)라는 말씀처럼, 어머니는 이 말씀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사신 분이셨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어머니에게 하느님 나라라는 집을 마련해 주셨고 선종을 허락하신 것이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3일 전,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미사를 봉헌하며 90회 생신 미사를 가졌고, 먼 곳에 사시는 외숙부 가족이 한자리에서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었다. 그 날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셨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던 아침, 3일 전의 가족모임으로 어머니께서 무척 피곤하실 거라는 생각에 전화로 아침 문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잘 있다고 자상하게 답해 주셨다.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는 점심식사 맛있게 드시고 수박 후식을 드신 다음 쉬어야겠다고 잠을 청하시며,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두 딸을 불러 모으시고 편안히 잠자듯 임종하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딸은 오히려 당황하지 않고 편안했다고 한다. 두 딸이 병자성사를 받고 임종을 지켜보며 어머니 귓가에 속삭이던 말은, “어머니,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였다.
어머니는 암흑의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고, 숱한 고생의 세월을 보내셨다. 당시의 그 흔한 이름이 아닌 ‘영희’라는 어머니 이름은 자녀들에게 늘 자랑스러웠다. 외조부님이 붙여준 신식 이름은 세상 속에 훌륭함으로 빛났다. 어머니는 처녀시절,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 프랑스 신부님으로부터 그 어려운 교리를 단숨에 익혀 '카타리나'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에 입문했다. 초등학교 선생으로 공직에 임용될 때도 하느님께서 도우셨다. 어머니는 윤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셔서 우리 집안을 업그레이드를 시켜주신 큰 은인이셨다. 어머니는 육남매 낳아 주시고, 5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70년대 초에 홀로 육남매를 대학까지 교육을 시키셨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겪은 여러 고통들을 어머니의 신앙 탓으로 돌리며 극복하셨다.
40년 전, 아버지께서 “애들아, 어머니 잘 모시고 어머니 신앙을 이어받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 하시던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유언을 하실 만큼 아버지도 신앙인이 되셨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도 영적인 큰 은인이셨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어머니의 삶의 여정은 고해였다. 그 고해를 극복하려고 신앙으로 삶을 이루신 어머니, 어머니가 간직하신 하느님의 생명이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 생명이 되어 풍요롭게 성장했다. 아들, 딸들을 훌륭한 신자로 사제와 수도자로 길러주신 어머님이 선종을 이루시고, 우리도 하느님의 생명을 담고 살도록 하셨다. 어머니는 늘 힘드실 땐 성당에 있으셨다. 성체조배, 미사참례. 교회 봉사 활동과 교육, 그리고 본당 신부님들을 도와 교회의 어머니로서 지내셨다. 일생동안 89명을 영세 입교시키셨다. 어머니의 대녀들이 찾아와 연도를 하는 모습은 어머니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살다가 하느님의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어머니의 선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 어머니는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양업학교’를 한다고 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참 좋은 일이다. 기도하마.”하시며 기도로 함께 해주셨다.
세상을 떠나시던 날, 공경하올 주교님과 동창 신부, 교구 사제단과 성당을 꽉 메워주신 수녀님들과 신자 분들과 장례미사를 봉헌하며 성가대의 성가 소리는 아름다운 천상을 보는 듯 했다. 고별식에서의 아들 신부가 행한 어머님을 향한 분향은 함께하는 모든 분들의 기도와 합해져서 하느님께 올려 질 것이라 믿는다. ‘통공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는’ 우리는 이제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 덕분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정이 한 마음으로 피어난다. 어머니의 기도를 보답하려는 듯 양업고의 1기부터 10기까지의 졸업생들 학부모님, 졸업생들의 조문이 길게 이어졌다. 또한 재학생 학부모님과 재학생들도…. 모든 분들의 조문에 감사하며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