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유학 떠납니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091 | 작성일 : 2011년 7월 9일
저 유학 떠납니다.
졸업하고 제법 시간이 지났다. 양업의 한 졸업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몫을 찾아 국내며 해외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고 만나면 밝게 웃어보였고 학생 시절은 늘 예쁘고 반듯한 학생으로 지냈다. 그동안도 자주 모교를 방문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랑스러운 양업인이 될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며칠 전에는 모교를 찾아와, “신부님, 저 유학 떠납니다.”라는 것이다. 늘 만날 때마다 진취적인 성숙한 모습을 보였는데, 뚜렷한 목표 의식과 열정의 모험심을 갖고 있기에, 그가 세상에 멋있게 서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갔다. 나는 그 제자를 만날 때면 이 학교를 어떻게 해서 입학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었다. “신부님, 아직도 저의 일에 관하여 모르십니까?” 하며 지난 일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 주었다.
“초등학교 때, 저와 엄마는 아버지와 냉전 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보기 싫었고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제가 가수를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집을 피할 구실로 한 가수의 팬이 되어 날마다 공연장을 찾았어요. 매일 그 가수가 움직일 때마다 저도 따라 움직였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는 셈이었지요.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와의 갈등은 1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지났습니다.
제가 양업에 온 것은, 학교에 내가 머물 기숙사가 있다는 것이 희소식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학교는 제가 도피처인 셈이지요. 학교를 찾다 보니 가톨릭 학교인 양업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옳다구나!’하며 입학을 했습니다. 사실 무척 행복했습니다.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었지요. 저를 양업에 데려다 놓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집안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였습니다. 저만 양업에서 훌륭한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도 새롭게 부부로 살도록 교육시켜주었지요. 부모님이 ME교육을 받으신 후, 부부의 정체성을 갖게 되셨고, 자녀의 갈등이 부모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이었음을 알고 뉘우치셨어요. 그 후로 부부 관계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 3학년 시절, 충격적인 일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 속에 있었음을 뉘우치며 통렬히 우셨어요. 어머니 앞에서 회개한 것이지요. 그 후로 아버지는 10년의 냉담을 풀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가정에 헌신적이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지냅니다.”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 문제로 이 학생이 공연장을 헤매며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학생들이 왜 문제를 일으킬까?’를 놓고 그 원인이 어른들이 만들어 낸 일 때문이라고 늘 설명을 하는데, 이 경우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 자신이 성장했기에, 저는 ‘하느님을 향해서 무엇을 할까?’ 하며 그 몫을 위해 식별하고 지냈습니다. 대학의 전공을 살려 한 전공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미래의 리더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렵니다. 그동안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며 공부에 대한 꿈을 꾸었어요. 교수님도 적극 추천을 하셨고요.”
스물다섯의 나이이다. 더 잘 세상에 서기 위해 그런 계획이 늦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상을 더 멀리 그리고 넓게 보면 볼수록 자네가 해야 할 하느님의 몫이 더 잘 보일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또한 이미 자네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이 세워지고, 열정을 지니고 있으니, 그 일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하고 추진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미래의 목표를 향해 자신을 키워가는 제자가 자랑스럽다. 자발성과 자기 주도성을 갖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제자가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지금 졸업생들과 마케팅 중이다. 이런 훌륭한 학생도 있지만, 아직도 꿈을 찾아 노력하는 학생들과도 만나고 있다. 철부지들이었던 시절의 학생들이 나에게 미안했던지 머리를 극적이며 부쩍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아름다운 이야기 꺼리가 되어 나에게 선물이 되고 값진 교육의 보람을 낳는다.
졸업하고 제법 시간이 지났다. 양업의 한 졸업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몫을 찾아 국내며 해외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고 만나면 밝게 웃어보였고 학생 시절은 늘 예쁘고 반듯한 학생으로 지냈다. 그동안도 자주 모교를 방문했었고 그럴 때마다 자랑스러운 양업인이 될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며칠 전에는 모교를 찾아와, “신부님, 저 유학 떠납니다.”라는 것이다. 늘 만날 때마다 진취적인 성숙한 모습을 보였는데, 뚜렷한 목표 의식과 열정의 모험심을 갖고 있기에, 그가 세상에 멋있게 서 있을 거라는 확신이 갔다. 나는 그 제자를 만날 때면 이 학교를 어떻게 해서 입학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었다. “신부님, 아직도 저의 일에 관하여 모르십니까?” 하며 지난 일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 주었다.
“초등학교 때, 저와 엄마는 아버지와 냉전 중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보기 싫었고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제가 가수를 좋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집을 피할 구실로 한 가수의 팬이 되어 날마다 공연장을 찾았어요. 매일 그 가수가 움직일 때마다 저도 따라 움직였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골탕 먹이려는 셈이었지요.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와의 갈등은 1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지났습니다.
제가 양업에 온 것은, 학교에 내가 머물 기숙사가 있다는 것이 희소식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학교는 제가 도피처인 셈이지요. 학교를 찾다 보니 가톨릭 학교인 양업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옳다구나!’하며 입학을 했습니다. 사실 무척 행복했습니다.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었지요. 저를 양업에 데려다 놓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집안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였습니다. 저만 양업에서 훌륭한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도 새롭게 부부로 살도록 교육시켜주었지요. 부모님이 ME교육을 받으신 후, 부부의 정체성을 갖게 되셨고, 자녀의 갈등이 부모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이었음을 알고 뉘우치셨어요. 그 후로 부부 관계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대학 3학년 시절, 충격적인 일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어요.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고통 속에 있었음을 뉘우치며 통렬히 우셨어요. 어머니 앞에서 회개한 것이지요. 그 후로 아버지는 10년의 냉담을 풀고 지금은 누구보다도 가정에 헌신적이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지냅니다.”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 문제로 이 학생이 공연장을 헤매며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학생들이 왜 문제를 일으킬까?’를 놓고 그 원인이 어른들이 만들어 낸 일 때문이라고 늘 설명을 하는데, 이 경우도 그렇지 않은가.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제 자신이 성장했기에, 저는 ‘하느님을 향해서 무엇을 할까?’ 하며 그 몫을 위해 식별하고 지냈습니다. 대학의 전공을 살려 한 전공 분야에서 일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미래의 리더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렵니다. 그동안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며 공부에 대한 꿈을 꾸었어요. 교수님도 적극 추천을 하셨고요.”
스물다섯의 나이이다. 더 잘 세상에 서기 위해 그런 계획이 늦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세상을 더 멀리 그리고 넓게 보면 볼수록 자네가 해야 할 하느님의 몫이 더 잘 보일 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또한 이미 자네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이 세워지고, 열정을 지니고 있으니, 그 일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하고 추진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미래의 목표를 향해 자신을 키워가는 제자가 자랑스럽다. 자발성과 자기 주도성을 갖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제자가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지금 졸업생들과 마케팅 중이다. 이런 훌륭한 학생도 있지만, 아직도 꿈을 찾아 노력하는 학생들과도 만나고 있다. 철부지들이었던 시절의 학생들이 나에게 미안했던지 머리를 극적이며 부쩍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이 아름다운 이야기 꺼리가 되어 나에게 선물이 되고 값진 교육의 보람을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