휙 소리내며 지나는 인생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31 | 작성일 : 2010년 11월 12일
‘휙’소리 내며 지나는 인생
찬바람이 일어 낙엽들이 이리 저리 몰리다가 곤두박질 처박히는 모습을 보면 스산한 느낌이 든다. 자연은 언제나 푸를 것이라는 생각만을 했는데, 어느덧 자연도 생을 마감하고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
11월 중순, 황혼이 질 무렵 묘원을 찾았다. 따스한 햇살로 예쁘게 물든 산자락이 감싸 안은 묘원이 평화스러웠다. 토요일 오후인데 묘원은 내방객으로 붐볐다. 나도 부모님이 모셔진 묘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형제들과 기도드리며, 행복했던 지난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침 묘원을 떠나면서 엊그제 세상을 떠나신 은사 신부님 묘를 방문했다.
“신부님, ‘은퇴’가 병이 되나요? 그렇게 차돌처럼 건강하시던 신부님이 은퇴를 하시던 날부터 덤으로 오래 사실 것 같은 예감에 문제가 생기셨지요. 그리고 끝내 하느님 앞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네요.” 은사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신부님, 저희들과 함께했던 신학교의 교수 시절이 행복하셨지요?” 하자, 투병이지만 맑은 미소를 지으시며 애써 기운을 차리시며, “응, 그랬지. 사제로 잘들 사시게”하셨다. 신부님은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 숨이 고르지 못하셨다. 신부님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마지막 강복을 드리자, 신부님도 기운을 차리며 십자성호를 긋는다.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 계신 곳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두발로 서서 걷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제로 살다 사제로 떠나시는 신부님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신부님, 이승에서도 행복하셨으니 저승에서도 행복하십시오.” 하느님께로 돌아가신 신부님을 향해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일 년이 휙 하고 지나는 것처럼, 세월도 ‘휙’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나의 부모님과 은사 신부님도 휙 소리를 내는 사이 세상을 행복하게 떠나셨다. 죽음이란 단어는 꺼내기 조차 싫은 단어지만 주변에서 죽음을 대할 때면 더욱 강하게 살아난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고, 돼지는 고깃덩어리를 사람에게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인간’은 무엇을 열매로 할 것인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데 아무 목적도 없이 휙 소리 들리 듯 대책 없이 지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사람의 열매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믿음으로 알고 있다.
신앙 없이 살아갔던 사람들 대부분의 인생목적은 추상적이었다. 하찮은 생명도 가치와 목적이 분명한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마치 우문처럼 대하며 시큰둥할 뿐이다. 그러나 이 질문만큼 골치 아픈 문제도 없다. 시집가고 장가들고, 먹고 마시고, 심고 짓고 하며 나이 들어 어른이 되었는데도, 인생 전체를 종합하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면, 어디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겠는가. 청소년들은 오장육부가 다 건실하여 건강을 믿고 살아가기에, 미성숙하기에, 발육과정에 있기에, 이 물음을 우문처럼 취급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들고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지내는 소위 자신이 생각하길 성숙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이 철학적 물음에 진지한 답을 갖고 살지 못했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남자들은 교만하여 남 앞에 서기를 좋아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윗자리를 탐하며 거드름 피다가, 정년이 되면 내려놓은 관직을 더 앞세우며 늙어가는 모습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관직에 물러나면 평민으로 퇴장하여 초야에 묻혀 겸손해 져야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돌아갈 준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여자들은 아름다운 미모를 잃는 것이 안타까워 몸치장해 보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평준화되는 나이를 탓하며,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워 한숨을 짓는다.
묘원에 가보라. “오늘은 너에게, 내일은 나에게” 죽음은 내 일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인생, 이제 자신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거품을 다 빼야 한다. 반성해야 할 것도 많고, 돌아 볼일도 많다. 지난 시간에 애착을 가지고 뒤를 돌아다보는 인생은 서글프다. 이제 생명의 결실을 위해 준비할 일이 생겨났다. 단풍을 주워 들고 ‘너는 아름답구나.’라고 하듯이, 너 또한 말년이 되면 사람들이 너의 죽음을 보고 ‘너도 아름답구나!’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그 분께 맡겨드리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누적되면 곱게 물든 단풍처럼 너의 생도 아름다운 생을 살았다고 세상 사람이 먼저 말해줄 것이다.
찬바람이 일어 낙엽들이 이리 저리 몰리다가 곤두박질 처박히는 모습을 보면 스산한 느낌이 든다. 자연은 언제나 푸를 것이라는 생각만을 했는데, 어느덧 자연도 생을 마감하고 겨울의 문턱을 넘는다.
11월 중순, 황혼이 질 무렵 묘원을 찾았다. 따스한 햇살로 예쁘게 물든 산자락이 감싸 안은 묘원이 평화스러웠다. 토요일 오후인데 묘원은 내방객으로 붐볐다. 나도 부모님이 모셔진 묘에서 오래도록 머물며 형제들과 기도드리며, 행복했던 지난 일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침 묘원을 떠나면서 엊그제 세상을 떠나신 은사 신부님 묘를 방문했다.
“신부님, ‘은퇴’가 병이 되나요? 그렇게 차돌처럼 건강하시던 신부님이 은퇴를 하시던 날부터 덤으로 오래 사실 것 같은 예감에 문제가 생기셨지요. 그리고 끝내 하느님 앞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네요.” 은사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신부님, 저희들과 함께했던 신학교의 교수 시절이 행복하셨지요?” 하자, 투병이지만 맑은 미소를 지으시며 애써 기운을 차리시며, “응, 그랬지. 사제로 잘들 사시게”하셨다. 신부님은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듯 숨이 고르지 못하셨다. 신부님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마지막 강복을 드리자, 신부님도 기운을 차리며 십자성호를 긋는다.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 계신 곳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두발로 서서 걷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제로 살다 사제로 떠나시는 신부님이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신부님, 이승에서도 행복하셨으니 저승에서도 행복하십시오.” 하느님께로 돌아가신 신부님을 향해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일 년이 휙 하고 지나는 것처럼, 세월도 ‘휙’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나의 부모님과 은사 신부님도 휙 소리를 내는 사이 세상을 행복하게 떠나셨다. 죽음이란 단어는 꺼내기 조차 싫은 단어지만 주변에서 죽음을 대할 때면 더욱 강하게 살아난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고, 돼지는 고깃덩어리를 사람에게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인간’은 무엇을 열매로 할 것인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데 아무 목적도 없이 휙 소리 들리 듯 대책 없이 지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사람의 열매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믿음으로 알고 있다.
신앙 없이 살아갔던 사람들 대부분의 인생목적은 추상적이었다. 하찮은 생명도 가치와 목적이 분명한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왔는가?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마치 우문처럼 대하며 시큰둥할 뿐이다. 그러나 이 질문만큼 골치 아픈 문제도 없다. 시집가고 장가들고, 먹고 마시고, 심고 짓고 하며 나이 들어 어른이 되었는데도, 인생 전체를 종합하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면, 어디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겠는가. 청소년들은 오장육부가 다 건실하여 건강을 믿고 살아가기에, 미성숙하기에, 발육과정에 있기에, 이 물음을 우문처럼 취급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들고 인생의 후반부를 살고 지내는 소위 자신이 생각하길 성숙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이 철학적 물음에 진지한 답을 갖고 살지 못했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남자들은 교만하여 남 앞에 서기를 좋아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윗자리를 탐하며 거드름 피다가, 정년이 되면 내려놓은 관직을 더 앞세우며 늙어가는 모습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관직에 물러나면 평민으로 퇴장하여 초야에 묻혀 겸손해 져야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돌아갈 준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여자들은 아름다운 미모를 잃는 것이 안타까워 몸치장해 보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평준화되는 나이를 탓하며, 자신의 모습이 안타까워 한숨을 짓는다.
묘원에 가보라. “오늘은 너에게, 내일은 나에게” 죽음은 내 일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휙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인생, 이제 자신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그리고 거품을 다 빼야 한다. 반성해야 할 것도 많고, 돌아 볼일도 많다. 지난 시간에 애착을 가지고 뒤를 돌아다보는 인생은 서글프다. 이제 생명의 결실을 위해 준비할 일이 생겨났다. 단풍을 주워 들고 ‘너는 아름답구나.’라고 하듯이, 너 또한 말년이 되면 사람들이 너의 죽음을 보고 ‘너도 아름답구나!’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그 분께 맡겨드리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 누적되면 곱게 물든 단풍처럼 너의 생도 아름다운 생을 살았다고 세상 사람이 먼저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