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자라고, 나도 자라고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69 | 작성일 : 2010년 11월 12일
나도 자라고, 너도 자라고
사제는 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기에 신자 분들 없이 사제의 삶은 윤택할 수 없다. 사제는 사목현장에서 태어나는 어린 아이부터 초․ 중․ 고․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들이 훌쩍 자라 직장의 의무를 성실히 살며, 자녀를 양육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사제도 ‘잘 살아야지!’ 하는 사제직의 숭고한 의무를 깨닫는다. 사제도 그분들도 같이 연륜이 쌓여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든다. 노년의 사제는 함께 걸었던 동반자들의 삶을 반추하며 행복해 하며, 동반자들을 위하여, 동반자들은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며 황혼 길에 죽음을 맞고 장례미사를 거행한다. 사제의 삶도 나의 동반자인 신자들의 삶도 똑같이 모두가 축복된 삶이다. 사제들도 신자들도 예수님을 닮아 모든 이에게 열려있고 모든 이들을 향해 사랑하며 삶을 이어간다.
사제와 신자, 서로의 삶이 독특하지만 특별히 사제의 삶은 더욱 독특하다. 사제는 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그런 속에서 사제가 성숙하게 자라난다. 사제는 남녀노소 신자들 모두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하나도 예외 됨이 없이 사람들을 똑같이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사제는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다. 특별하게 남녀노소 모두의 삶을 바라보며 살던 본당 시절이 더욱 그랬다. 사제는 본당을 떠나서는 신자들이 없어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사제는 신자들이 소중했다. 특수 사목지인 학교로 자리를 옮긴다니 힘이 되어주는 신자들이 갑자기 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두려웠다. 학교로 사목지를 옮긴지도 벌써 큰 본당 세 곳을 옮길만한 햇수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매번 사제 인사이동이 있지만 본당이란 꿈을 접었다. 이제는 그만큼 학교생활이 본당 생활보다 익숙해져 있다. 학교경영 초년 시절을 살고 나서 교육을 더 깊이 알았고, 학생들과 지내는 맛도 제법 쏠쏠하고 행복하다.
연륜이 쌓이니 때로는 본당의 옛 신자 분들이 그립다. 지금 학교에서 만나는 신자들은 이해관계로 좀 거리가 있다. 자녀문제가 아닐 때면 상냥하던 부모도 자기 자녀 문제가 생겨나면 이성보다는 감정 섞인 학부모로 돌변한다. 자기 자녀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남의 자녀를 폄하하며 콩이냐, 팥이냐 하고 학교를 불평했다. 때로는 부정적 말로 익숙한 네티즌처럼 학교평가를 하기도 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될 소리 안 될 소리 막 해댄다. 만나지 않을 사람처럼 그랬다. 매년 시간이 지나면 학부모의 카타르시스는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한 학부모는 ‘교육철학이 뭐 이러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 후유증이 태풍의 눈이 되어 살아났고, 지금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하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제사인 미사성제를 날마다 거행하며 예수님을 닮기로 했다. 사랑하자! 몇 번이고 되 뇌여 본다. 그분들이 있기에 내 힘을 빼지만 또 도움도 주고받고 서로가 함께 걸어갈 동반자로 여기니 감사하는 일만 남아 있다.
하느님만을 믿고 사는 사제로서 행복하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본당의 신자들이 편안했다면, 학교는 때로 발생하는 자녀문제로 이해관계가 생겨 때로는 힘이 든다. 이런 고통 때문에 내 생명이 자라고, 신자들인 학부모와 자녀들도 성장하는 동력이 된다.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만남의 본당보다 구체적인 만남 때문에 파열음을 내고 괴롭지만 너도 살고 나도 살아 큰 생명으로 자라나있다. 한 주기로 3년이란 세월이 지나지만 점점 더 학부모의 자녀 사랑이 과잉보호로 이어져 학교는 더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리라.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사랑하는 동반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제는 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기에 신자 분들 없이 사제의 삶은 윤택할 수 없다. 사제는 사목현장에서 태어나는 어린 아이부터 초․ 중․ 고․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들이 훌쩍 자라 직장의 의무를 성실히 살며, 자녀를 양육하며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사제도 ‘잘 살아야지!’ 하는 사제직의 숭고한 의무를 깨닫는다. 사제도 그분들도 같이 연륜이 쌓여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든다. 노년의 사제는 함께 걸었던 동반자들의 삶을 반추하며 행복해 하며, 동반자들을 위하여, 동반자들은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며 황혼 길에 죽음을 맞고 장례미사를 거행한다. 사제의 삶도 나의 동반자인 신자들의 삶도 똑같이 모두가 축복된 삶이다. 사제들도 신자들도 예수님을 닮아 모든 이에게 열려있고 모든 이들을 향해 사랑하며 삶을 이어간다.
사제와 신자, 서로의 삶이 독특하지만 특별히 사제의 삶은 더욱 독특하다. 사제는 신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그런 속에서 사제가 성숙하게 자라난다. 사제는 남녀노소 신자들 모두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하나도 예외 됨이 없이 사람들을 똑같이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사제는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다. 특별하게 남녀노소 모두의 삶을 바라보며 살던 본당 시절이 더욱 그랬다. 사제는 본당을 떠나서는 신자들이 없어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사제는 신자들이 소중했다. 특수 사목지인 학교로 자리를 옮긴다니 힘이 되어주는 신자들이 갑자기 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두려웠다. 학교로 사목지를 옮긴지도 벌써 큰 본당 세 곳을 옮길만한 햇수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매번 사제 인사이동이 있지만 본당이란 꿈을 접었다. 이제는 그만큼 학교생활이 본당 생활보다 익숙해져 있다. 학교경영 초년 시절을 살고 나서 교육을 더 깊이 알았고, 학생들과 지내는 맛도 제법 쏠쏠하고 행복하다.
연륜이 쌓이니 때로는 본당의 옛 신자 분들이 그립다. 지금 학교에서 만나는 신자들은 이해관계로 좀 거리가 있다. 자녀문제가 아닐 때면 상냥하던 부모도 자기 자녀 문제가 생겨나면 이성보다는 감정 섞인 학부모로 돌변한다. 자기 자녀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남의 자녀를 폄하하며 콩이냐, 팥이냐 하고 학교를 불평했다. 때로는 부정적 말로 익숙한 네티즌처럼 학교평가를 하기도 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될 소리 안 될 소리 막 해댄다. 만나지 않을 사람처럼 그랬다. 매년 시간이 지나면 학부모의 카타르시스는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한 학부모는 ‘교육철학이 뭐 이러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 후유증이 태풍의 눈이 되어 살아났고, 지금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용하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제사인 미사성제를 날마다 거행하며 예수님을 닮기로 했다. 사랑하자! 몇 번이고 되 뇌여 본다. 그분들이 있기에 내 힘을 빼지만 또 도움도 주고받고 서로가 함께 걸어갈 동반자로 여기니 감사하는 일만 남아 있다.
하느님만을 믿고 사는 사제로서 행복하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본당의 신자들이 편안했다면, 학교는 때로 발생하는 자녀문제로 이해관계가 생겨 때로는 힘이 든다. 이런 고통 때문에 내 생명이 자라고, 신자들인 학부모와 자녀들도 성장하는 동력이 된다.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만남의 본당보다 구체적인 만남 때문에 파열음을 내고 괴롭지만 너도 살고 나도 살아 큰 생명으로 자라나있다. 한 주기로 3년이란 세월이 지나지만 점점 더 학부모의 자녀 사랑이 과잉보호로 이어져 학교는 더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리라. 언제나 그렇듯이 나의 사랑하는 동반자로 여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