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62 | 작성일 : 2010년 12월 14일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양심에 비추어 법 없이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원칙과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은 사랑도, 양심도, 법도 없는 듯 권리만 챙기는 듯해서 안타깝다. 그렇다고 세상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만한 훌륭한 위인도 없는 듯하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아 꼬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책임을 물으며 생명까지 바칠 생명의 주인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쫒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 말고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까? 본질의 왜곡이 심각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염불을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기 때문이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성전을 잡상인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전 문에서 번제 제물을 팔고 환전상으로 이익을 챙기며 신도들을 속여 부정축재를 했다. 원로 지도자들은 소위 얄팍한 상술로 권리를 챙겼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경고하신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사랑이 없다면 의무로라도 책임을 다하라고 회개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고, 허물벗기 두려워 차라리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했다. 그들은 본질로의 회귀를 끝내 거부한다. 법을 집행하는 율사들은 그 직무로 이익의 방편이 되었다. 대사제는 하느님을 향한 성실의 의무를 버렸다. 성실한 척하는 바리사이들에게는 마음에 거품이 생겨 표리부동했다. 이런 속화를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좋아 할리 없다. 결국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죽인다음에야 직성이 풀렸다. 오늘 날 신앙인은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을 보며 인간인척 비통해 하지만, 여전히 속물로 남는다. 아무런 죄도 없다는 듯 또 일상으로 살아간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 시대의 상황이라면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본질에 비추어 사랑과 양심과 법을 버린 속물들은 자기가 법과 기준이 되어 결국 자기가 만든 무뎌진 칼에 맞아 죽는다. 권리를 무한대로 누리고, 의무는 딴전이고, 그 부실함의 책임은 피하려 한다. 행정상 형사상 책임을 묻기라도 하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도망가고 피하려 하고, 오히려 보복하고 죽이려 음모를 꾸민다. 이런 모습은 세상 속의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인가 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다 통하지 않으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지고 덤벼든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그러면 참을 수 있는데 성인이 그러니 큰일이다.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의 관계가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제대로 정립되었으면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녹아나 사랑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이 되도록 살아가는 대림절이 되었으면 한다. 대림이 지나면 성탄이 온다.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양심에 비추어 법 없이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원칙과 법규를 철저히 준수하며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은 사랑도, 양심도, 법도 없는 듯 권리만 챙기는 듯해서 안타깝다. 그렇다고 세상의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만한 훌륭한 위인도 없는 듯하다. 그것은 만에 하나라도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아 꼬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책임을 물으며 생명까지 바칠 생명의 주인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쫒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 말고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까? 본질의 왜곡이 심각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염불을 마음이 없고 젯밥에만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기 때문이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성전을 잡상인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전 문에서 번제 제물을 팔고 환전상으로 이익을 챙기며 신도들을 속여 부정축재를 했다. 원로 지도자들은 소위 얄팍한 상술로 권리를 챙겼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경고하신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사랑이 없다면 의무로라도 책임을 다하라고 회개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고, 허물벗기 두려워 차라리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했다. 그들은 본질로의 회귀를 끝내 거부한다. 법을 집행하는 율사들은 그 직무로 이익의 방편이 되었다. 대사제는 하느님을 향한 성실의 의무를 버렸다. 성실한 척하는 바리사이들에게는 마음에 거품이 생겨 표리부동했다. 이런 속화를 질책하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좋아 할리 없다. 결국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고 죽인다음에야 직성이 풀렸다. 오늘 날 신앙인은 예수님의 처절한 죽음을 보며 인간인척 비통해 하지만, 여전히 속물로 남는다. 아무런 죄도 없다는 듯 또 일상으로 살아간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 시대의 상황이라면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본질에 비추어 사랑과 양심과 법을 버린 속물들은 자기가 법과 기준이 되어 결국 자기가 만든 무뎌진 칼에 맞아 죽는다. 권리를 무한대로 누리고, 의무는 딴전이고, 그 부실함의 책임은 피하려 한다. 행정상 형사상 책임을 묻기라도 하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려 하지 않고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도망가고 피하려 하고, 오히려 보복하고 죽이려 음모를 꾸민다. 이런 모습은 세상 속의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인가 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다 통하지 않으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지고 덤벼든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그러면 참을 수 있는데 성인이 그러니 큰일이다.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의 관계가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제대로 정립되었으면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녹아나 사랑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이 되도록 살아가는 대림절이 되었으면 한다. 대림이 지나면 성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