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같은 똑똑 이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302 | 작성일 : 2011년 2월 25일

                              바보 같은 똑똑 이

  나는 공동체를 위해 투신하는 그런 아빠가 좋다. 그런 분을 만나면 덩달아 행복해진다. 생각만 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농사를 관념만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오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푹 빠져 미구의 풍요로운 결실을 희망하며 행복을 이루어내는 농사꾼처럼 그렇게 충실하게 사는 그런 분을 나는 좋아한다. 나는 그런 분을 만났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그 분은 자신을 좀처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시, 초를 다투면서 현장에 나타났다. 시간과 재산이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다. 자신을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이웃의 생명이 되어주시는 분이시다. 약삭빠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보기에 그분은 분명 바보였다. 그 바보 한 분은 의례적으로 학교를 위해서 선생님을 위해서 일하는 분이 분명 아니었다. 만나면 언제나 겸손했으며 사실 그대로 객관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떻게 하면 남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여겨 보다 더 잘 해결해 줄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분이였다. 해결사의 일로 인해 때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고, 관념으로 살아갔던 부정적인 사람들로부터 심한 시달림도 받았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늘 생생하게 좌우명처럼, ‘한 번 양업이면 영원한 양업이다’ 라는 말로 졸업으로 학교와 단절됨이 아니라 연속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며, 졸업 후에도 똑 같은 마음하고 학교와 만나고 있다.
  3년 동안 지낸 일들을 돌아본다. 그분은 아들로 생겨난 문제 건, 다른 자녀로 생겨난 문제건 그 일로 말썽이 일면 남들처럼 맹목적으로 자식을 감싸고 비호하는 분이 아니었다. 객관적 입장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자세로 언제나 공동체를 존중하고 사랑했다. 정도를 살폈고, 객관성을 유지하려 시간을 두고 마음에 새기고 되새김질 하여 학교를 도왔다. 3년 내내 집과 학교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비상회의 때나, 학부모 회의에 함께했다. 자신의 사업 일이 시간에 쫓겨 버거운데도 늘 꼭 같은 마음하고 일의 현장에 달려 왔다. 학교가 학생들의 잘못을 보고 책임을 물을 때에도, 그 분은 부모의 자녀교육에 대한 부족함을 탓했고, 자녀가 정도를 걷도록 혹독할 정도로 엄격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게 될 것이다.(루카 6, 38)”라는 성경구절처럼 남에게 넉넉하게 주었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축복을 넉넉하게 받는다. 그 분은 우리들 대화 속에 주변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래드 존 학생 소식을 듣기라도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 자식이 포함된 학년만 챙기는 분이 아니라, 학년을 뛰어넘어 어려움의 학생이 있으면 아낌없는 희사를 해 주셨다. 어디 이런 일들이 한두 번이던가. 넉넉한 마음하고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행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나는 그분과 3년을 함께 걸어가며 그분을 바라보고 늘 즐겁고 행복했다. 철없던 아들 녀석은 내가 존경하는 자기 아빠의 아름다운 삶을 바라보며 성숙을 위해 배워 갈 것이다. 그리고 그도 철이 들어 아버지의 몫을 당당히 해 나갈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런 학부모 아빠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좋은 기를 불어 넣어주는 생명의 역할이 고맙고 감사하다. 학교 역사에 이 이야기는 귀감이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