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창의성이 발휘될까?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045 | 작성일 : 2011년 3월 28일
과연 창의성이 발휘될까?
노무현 정부 시절 교육의 화두가 ‘혁신(革新, innovation)’이었다. 그런데 혁신이 고작 가죽신(Leather shoes)이라는 난센스의 의미로 막을 내린 듯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혁신이라는 교육화두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창의(創意)’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사실 사고력의 전환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변화가 ‘혁신’이고, 사고력의 진행이 하위에서 상위로 상승함으로써 사고의 종합으로 더 성숙한 목표를 가질 때 창출되는 에너지가 ‘창의’이다. 혁신의 정의가 정착되기 전에, 새로운 정부가 창의라는 말을 꺼내들었으니, 이 정부가 퇴진하면 또 다른 화두가 떠오를 것이 뻔하기에 무엇으로 국민들의 환심을 살까 걱정이다. 정책의 입안자들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민의 사고를 집중해 보려고 하지만, 목표를 향한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내는 추동력이 얼마만큼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인성교육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제아들을 생활지도하는 수단의 정도로 이해되었고, 일선에서는 그 강조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 인성교육이 아직도 정착되지 않았는데 또 창의교육까지 들고 나와 ‘창의 인성교육’이란 말이 우리 속에 먹혀들어갈 만큼 일상화 된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요즘 고민이 솔직히 하나 더 늘었다. 창의라는 의미를 공감할 때 창의력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아직 창의라는 말에 접근하려는지 자신이 없다. 작품의 세계만도 그렇다. 소비자들은 선호하는 명품을 만났으면 하는 기대를 잔뜩 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 명품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교육의 좌표가 늘 불안했다. 그 불안한 이유가 있다. 교육의 목표가 단순히 대학진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학교에서 그리고 하루 종일 기계처럼 좁은 교실에서 지식을 수없이 집어 먹는다. 마치 A4용지 3분의 2 정도의 크기 면적에 닭 한마리가 운동 없이 먹이만 먹고, A4용지 두 장을 펼친 면적에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지낼 정도의 열악한 사육면적에 가축이 운동을 제한하며 생산을 목적으로 먹이만 먹이는 기계적인 사육처럼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정부는 구제역과 AI로 한참을 고생하다가 정책이론과 현장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발견하고는 외양간을 고치려 한다. 사육면적을 확보한 농민에게 축산허가제를 도입하겠다는 발상을 내 놓은 것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 맞는 정책이지만 현장의 축산 농가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태도에 농민이 반발하는 것은 뻔하다. 외양간을 고치면서 건강한 생명사육으로의 축산정책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 접근하지 못하는 오래된 습관을 고치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바뀌고 그럴 때 마다 지도자는 화려한 마사여구의 말을 꺼내들지만 지지기반이 없는 환경이 과연 그 말의 본뜻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있겠는가. 단순기억, 단순평가. 목표 없는 교육, 본질이 없는 교육, 대학가기 위해 진도 나가고 평가해서 내신 만들고 그 내신 때문에 단순기억경쟁력만 키우는 우리 교육에 지식의 연결, 논리적인 체계의 논술을 펴는 학생들도 만들어 주는 교육을 과연 얼마나 현장에서 해 왔는가? 물론 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신, 수능, 논술, 그리고 자기소개서답게 자기 안에 내장된 지적능력과 자질 등은 하위에서 상위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학습체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맹목적만 해 온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창의는 얼마만큼 의미가 있을까, ‘창의, 인성교육’이라는 교육의 화두가 기대에 걸맞게 좋다. 그러나 일선학교에서는 여전히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답답하니 묵시적 반발이 생겨난다. 그 반발은 창의력이 나오도록 우리가 교육하지 못하는 상활에서 그 발상이 나와 발상의 전환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 괴리이기에 끊임없이 풀어야할 과제가 아닌가?
노무현 정부 시절 교육의 화두가 ‘혁신(革新, innovation)’이었다. 그런데 혁신이 고작 가죽신(Leather shoes)이라는 난센스의 의미로 막을 내린 듯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혁신이라는 교육화두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창의(創意)’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사실 사고력의 전환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변화가 ‘혁신’이고, 사고력의 진행이 하위에서 상위로 상승함으로써 사고의 종합으로 더 성숙한 목표를 가질 때 창출되는 에너지가 ‘창의’이다. 혁신의 정의가 정착되기 전에, 새로운 정부가 창의라는 말을 꺼내들었으니, 이 정부가 퇴진하면 또 다른 화두가 떠오를 것이 뻔하기에 무엇으로 국민들의 환심을 살까 걱정이다. 정책의 입안자들이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민의 사고를 집중해 보려고 하지만, 목표를 향한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내는 추동력이 얼마만큼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인성교육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제아들을 생활지도하는 수단의 정도로 이해되었고, 일선에서는 그 강조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 인성교육이 아직도 정착되지 않았는데 또 창의교육까지 들고 나와 ‘창의 인성교육’이란 말이 우리 속에 먹혀들어갈 만큼 일상화 된 것처럼 회자되고 있다. 요즘 고민이 솔직히 하나 더 늘었다. 창의라는 의미를 공감할 때 창의력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아직 창의라는 말에 접근하려는지 자신이 없다. 작품의 세계만도 그렇다. 소비자들은 선호하는 명품을 만났으면 하는 기대를 잔뜩 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 명품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교육의 좌표가 늘 불안했다. 그 불안한 이유가 있다. 교육의 목표가 단순히 대학진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학교에서 그리고 하루 종일 기계처럼 좁은 교실에서 지식을 수없이 집어 먹는다. 마치 A4용지 3분의 2 정도의 크기 면적에 닭 한마리가 운동 없이 먹이만 먹고, A4용지 두 장을 펼친 면적에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지낼 정도의 열악한 사육면적에 가축이 운동을 제한하며 생산을 목적으로 먹이만 먹이는 기계적인 사육처럼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정부는 구제역과 AI로 한참을 고생하다가 정책이론과 현장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발견하고는 외양간을 고치려 한다. 사육면적을 확보한 농민에게 축산허가제를 도입하겠다는 발상을 내 놓은 것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 맞는 정책이지만 현장의 축산 농가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태도에 농민이 반발하는 것은 뻔하다. 외양간을 고치면서 건강한 생명사육으로의 축산정책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 접근하지 못하는 오래된 습관을 고치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바뀌고 그럴 때 마다 지도자는 화려한 마사여구의 말을 꺼내들지만 지지기반이 없는 환경이 과연 그 말의 본뜻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있겠는가. 단순기억, 단순평가. 목표 없는 교육, 본질이 없는 교육, 대학가기 위해 진도 나가고 평가해서 내신 만들고 그 내신 때문에 단순기억경쟁력만 키우는 우리 교육에 지식의 연결, 논리적인 체계의 논술을 펴는 학생들도 만들어 주는 교육을 과연 얼마나 현장에서 해 왔는가? 물론 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내신, 수능, 논술, 그리고 자기소개서답게 자기 안에 내장된 지적능력과 자질 등은 하위에서 상위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학습체계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맹목적만 해 온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창의는 얼마만큼 의미가 있을까, ‘창의, 인성교육’이라는 교육의 화두가 기대에 걸맞게 좋다. 그러나 일선학교에서는 여전히 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답답하니 묵시적 반발이 생겨난다. 그 반발은 창의력이 나오도록 우리가 교육하지 못하는 상활에서 그 발상이 나와 발상의 전환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 괴리이기에 끊임없이 풀어야할 과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