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재생이 필요할 때이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300 | 작성일 : 2010년 4월 23일
잔인한 4월, 재생(再生)이 필요할 때이다
유난히도 긴 겨울이었다. 4월 중순인데도 눈발이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떠나는 겨울이 우아한 백목련화에게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입히는 이유는 재생(再生)이 그렇게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밤새고 나면 좋은 아침이어야 하는데, 칙칙하고 어둡고, 때로는 혹한처럼 느껴지는 세상일들을 본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아이티의 지진, 칠레의 강진과 화산폭발로 인한 예측불허의 재해로 세상은 온통 상중이다. 기억조차 힘든 천안함 사태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서해 북단 백령도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바다 속 병사들의 애달픈 침묵의 절규는 어머니 마음 같은 구조를 원했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국민 모두는 답답해 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 규명도, 철저한 대책도 있어야 하겠지만,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재생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온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문구가 생각났다. 나는 그 내용도 모른 채 ‘4월은 잔인한 달’로만 기억했었다. 왜 4월이 잔인하가를 알고 싶어 그 시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잔인함의 의미는 진정한 재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잔인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마치 지난겨울이 따뜻했다며 재생의 봄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라의 중요한 사안인 ‘4대강 사업’이 그랬다.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하라는 요구를 많은 이들로부터 받고 있을 때, 사실 내 자신부터 무관심했다. 내 자신도 국책이니 바라보고 기다리자는 생각 외에는 무엇이 진정한 재생인가에 대하여 무관심했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충분히 이해시키려는 의지보다는, 그 사안을 추진하려는 의욕만 앞선 채 정권의 힘자랑을 하려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재생을 거부하듯이 진행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국민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사업에 동참할 리가 없다. 보막이 공사로 여주의 남한강에 물고기 떼죽음, 낙동강 부유물이 3배로 증가한다는 것에 겨우 눈을 떴다. “재생하라!” 라는 많은 이들의 나라사랑 외침이 거세지는데, 그제야 내 마음 속에 재생이 꿈틀거렸다.
보막이 공사가 4대강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4대강 살리기의 낙동강 사업구간인 대구 달성보 상류의 퇴적토에서 기준치를 넘는 중금속 성분이 검출되어 보막이 공사는 수질오염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보도(한겨레, 4.21)가 있었다. ‘운하반대 낙동강 지키기 운동본부’의 오염사례를 보면 카드뮴, 비소 니켈 등의 중금속이 미국의 해양대기청(NOAA)의 국제기준치를 초과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맞서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 관계자는 토양오염여부를 국립환경 연구소, 한국수자원공사 등에 의뢰해 중금속 기준치가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국가 연구소의 기준치’가 국제기준치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은 논리는 맞지 않는다. 요즘 본격적으로 많은 이들이 ‘4대강 사업 저지’에 나서고 있다. 이런 반대에도 정부의 태도는 얼마간 무반응이었다. 국책사업에 종합적인 환경영향평가를 했다고 하나, 서둘러 사업을 끝내려는 의도가 짙다. 국책은 시간을 두고 국민의 마음을 결집시켜 이루어져야 한다. 4대강 사업이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4대강 사업을 계속한다면,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재생을 국민들이 시도하려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하다. 아직도 쟁쟁한 월드컵의 함성, 올림픽에서의 야구경기에서 전승 무패를 이루어 낸 함성, 김연아의 승전보는 국민의 함성 덕분이었다. 선수들도 훌륭했지만 국민의 애를 조리면서 외친 함성에 힘입어 4강 신화를 이루어낸 월드컵 축구경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4.19 혁명을 떠올리며 동토처럼 굳어진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재생시킨 숭고함도 잔인한 달 4월에 국민이 만든 재생이었기에 4월이 뿌듯하다. 국민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진실한 재생을 이루었다. 미래를 희망 없이 기다리는 그런 소극적 국민이 아니었다. 역으로 이제 국민의 박수가 어우러진 함성을 만들어 낼 훌륭한 지도자들의 재생이 요구된다. 냉전시대의 한국의 봄은 여전히 춥다. 그러나 국민은 진실을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 바람을 거부하며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도 진정으로 재생되어야 한다. 천안함 희생이 가져다준 진정한 교훈은 지도자들이 재생이 되고, 국민들이 지도자에게 기립박수를 칠만큼 뜨거운 함성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명을 해치는 탐욕과 대결에서 진정한 재생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으면 좋겠다.
유난히도 긴 겨울이었다. 4월 중순인데도 눈발이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떠나는 겨울이 우아한 백목련화에게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입히는 이유는 재생(再生)이 그렇게 힘들다는 뜻일 것이다. 밤새고 나면 좋은 아침이어야 하는데, 칙칙하고 어둡고, 때로는 혹한처럼 느껴지는 세상일들을 본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아이티의 지진, 칠레의 강진과 화산폭발로 인한 예측불허의 재해로 세상은 온통 상중이다. 기억조차 힘든 천안함 사태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서해 북단 백령도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천안함이 두 동강 난 채 침몰했다. 바다 속 병사들의 애달픈 침묵의 절규는 어머니 마음 같은 구조를 원했지만 여러 상황 때문에 국민 모두는 답답해 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 규명도, 철저한 대책도 있어야 하겠지만,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재생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T.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온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문구가 생각났다. 나는 그 내용도 모른 채 ‘4월은 잔인한 달’로만 기억했었다. 왜 4월이 잔인하가를 알고 싶어 그 시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잔인함의 의미는 진정한 재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잔인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마치 지난겨울이 따뜻했다며 재생의 봄을 거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라의 중요한 사안인 ‘4대강 사업’이 그랬다. 본래의 모습으로 재생하라는 요구를 많은 이들로부터 받고 있을 때, 사실 내 자신부터 무관심했다. 내 자신도 국책이니 바라보고 기다리자는 생각 외에는 무엇이 진정한 재생인가에 대하여 무관심했었다. 정부는 ‘4대강 사업’을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충분히 이해시키려는 의지보다는, 그 사안을 추진하려는 의욕만 앞선 채 정권의 힘자랑을 하려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재생을 거부하듯이 진행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국민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사업에 동참할 리가 없다. 보막이 공사로 여주의 남한강에 물고기 떼죽음, 낙동강 부유물이 3배로 증가한다는 것에 겨우 눈을 떴다. “재생하라!” 라는 많은 이들의 나라사랑 외침이 거세지는데, 그제야 내 마음 속에 재생이 꿈틀거렸다.
보막이 공사가 4대강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4대강 살리기의 낙동강 사업구간인 대구 달성보 상류의 퇴적토에서 기준치를 넘는 중금속 성분이 검출되어 보막이 공사는 수질오염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보도(한겨레, 4.21)가 있었다. ‘운하반대 낙동강 지키기 운동본부’의 오염사례를 보면 카드뮴, 비소 니켈 등의 중금속이 미국의 해양대기청(NOAA)의 국제기준치를 초과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맞서 정부의 ‘4대강 살리기 추진본부’ 관계자는 토양오염여부를 국립환경 연구소, 한국수자원공사 등에 의뢰해 중금속 기준치가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국가 연구소의 기준치’가 국제기준치보다 우선한다는 주장은 논리는 맞지 않는다. 요즘 본격적으로 많은 이들이 ‘4대강 사업 저지’에 나서고 있다. 이런 반대에도 정부의 태도는 얼마간 무반응이었다. 국책사업에 종합적인 환경영향평가를 했다고 하나, 서둘러 사업을 끝내려는 의도가 짙다. 국책은 시간을 두고 국민의 마음을 결집시켜 이루어져야 한다. 4대강 사업이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4대강 사업을 계속한다면,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재생을 국민들이 시도하려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위대하다. 아직도 쟁쟁한 월드컵의 함성, 올림픽에서의 야구경기에서 전승 무패를 이루어 낸 함성, 김연아의 승전보는 국민의 함성 덕분이었다. 선수들도 훌륭했지만 국민의 애를 조리면서 외친 함성에 힘입어 4강 신화를 이루어낸 월드컵 축구경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4.19 혁명을 떠올리며 동토처럼 굳어진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재생시킨 숭고함도 잔인한 달 4월에 국민이 만든 재생이었기에 4월이 뿌듯하다. 국민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진실한 재생을 이루었다. 미래를 희망 없이 기다리는 그런 소극적 국민이 아니었다. 역으로 이제 국민의 박수가 어우러진 함성을 만들어 낼 훌륭한 지도자들의 재생이 요구된다. 냉전시대의 한국의 봄은 여전히 춥다. 그러나 국민은 진실을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 바람을 거부하며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도 진정으로 재생되어야 한다. 천안함 희생이 가져다준 진정한 교훈은 지도자들이 재생이 되고, 국민들이 지도자에게 기립박수를 칠만큼 뜨거운 함성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명을 해치는 탐욕과 대결에서 진정한 재생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