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Story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29 | 작성일 : 2010년 10월 6일
BEHIND STORY
지독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대인관계에서 부적응인 학생이 있었다. 양업고등학교에 입학 후 2년이 지나도록 마음을 열지 않고 혼자서 학교주변을 서성였다. 1년 해가 기울 무렵, 그는 모처럼 입을 열어 한 말은,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듯 전학을 시켜달라고 주문했었다. 학교는 부모를 설득했고, 부모는 아들에게 ‘참아내며 중심잡고 지내라.’ 며 아들의 주문을 일축했다. 당시 학교생활을 접으려고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졸라댄 상황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했고, 부모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외적으로 부모의 입장이 단호했던 탓인지, 아들은 억지로 학교에 남아 있었고, 부모는 인내하며 기다렸다. 2학년 중반 무렵에도 그 학생은 여전히 혼자 서성이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학교 주변의 산판과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교무실에 찾아와서는 선생님들에게 입을 떼는 것이 전부였다. 1학년 말 축제 때는 무대 뒤로 꼭 꼭 숨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막말가지 하며 분통을 터트렸었다.
2학년을 마무리 할 무렵 그에게 변화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학생이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고, 동료들과 함께 웃어 보이며 지내고 있었다. 마침 2학년 말 학교 축제가 있었는데, 무대공포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처럼 지내던 그 학생이 동료들과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 아이가, 마치 잘 적응한 연예인이 무대를 휘젓는 것처럼 날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부모들은 자기 아들만 사랑하기에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무대를 지켜보던 선후배와 선생님들은 환호했다. 와, 00 파이팅!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는 손에 붙잡아 맨 풍선을 놓았을 때 자유롭게 날아가는 풍선처럼 그런 느낌으로 비상했고, 그 학생은 그렇게 축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당당히 서서 자신감을 갖고 졸업을 했다.
나는 졸업 후에도 그 학생이 어떻게 발전되는가에 관심이 있어 종종 전화를 걸었고, 땀흘려 노력하는 그에게 격려도 잊지 않았다, 졸업 후에도 일 년이면 몇 번씩 자연스럽게 부모를 만났었다. 그 학생은 자발성을 갖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하고 있고, 부모는 만날 때마다 학교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고 있었다. “신부님, 그 놈이 말입니다. 그 놈이 전학시켜 달라고 했던 이유가 자기를 귀찮게 하는 동료들이나 선배들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이 부적응 때문에 꾸민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그 놈이 말했던 아이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왕따 당하고, 폭력에 시달렸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시의 자기 부적응의 한계를 피해 도망가고 싶어 만들어 낸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고 실토했다. 만일 당시 아들 말만을 듣고 학교를 원망했다면 지금도 학교를 원망하고, 아들을 미워하며 그 놈의 부적응을 보며 원수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 놈이 또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학교에서 자기가 설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 준 양업과 동료 친구들이 고맙다고요. 제가 무대에 오른 것은 기숙사 생활에서 한 방을 쓰던 동료들이 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댄스를 가르치기로 음모를 꾸민 덕분이지요. 덕분에 무대에 오른 것이고요. 양업은 저를 괴롭히지 않았고 동료로 맞이해준 좋은 학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장한 또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졸업앨범을 꺼냈다. 그 학생이 변화된 것은 의리 있는 기숙사 방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우러져 만든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지독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대인관계에서 부적응인 학생이 있었다. 양업고등학교에 입학 후 2년이 지나도록 마음을 열지 않고 혼자서 학교주변을 서성였다. 1년 해가 기울 무렵, 그는 모처럼 입을 열어 한 말은, ‘학교를 그만 두겠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듯 전학을 시켜달라고 주문했었다. 학교는 부모를 설득했고, 부모는 아들에게 ‘참아내며 중심잡고 지내라.’ 며 아들의 주문을 일축했다. 당시 학교생활을 접으려고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졸라댄 상황은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했고, 부모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외적으로 부모의 입장이 단호했던 탓인지, 아들은 억지로 학교에 남아 있었고, 부모는 인내하며 기다렸다. 2학년 중반 무렵에도 그 학생은 여전히 혼자 서성이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학교 주변의 산판과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교무실에 찾아와서는 선생님들에게 입을 떼는 것이 전부였다. 1학년 말 축제 때는 무대 뒤로 꼭 꼭 숨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막말가지 하며 분통을 터트렸었다.
2학년을 마무리 할 무렵 그에게 변화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학생이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고, 동료들과 함께 웃어 보이며 지내고 있었다. 마침 2학년 말 학교 축제가 있었는데, 무대공포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처럼 지내던 그 학생이 동료들과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 아이가, 마치 잘 적응한 연예인이 무대를 휘젓는 것처럼 날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부모들은 자기 아들만 사랑하기에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무대를 지켜보던 선후배와 선생님들은 환호했다. 와, 00 파이팅!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는 손에 붙잡아 맨 풍선을 놓았을 때 자유롭게 날아가는 풍선처럼 그런 느낌으로 비상했고, 그 학생은 그렇게 축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당당히 서서 자신감을 갖고 졸업을 했다.
나는 졸업 후에도 그 학생이 어떻게 발전되는가에 관심이 있어 종종 전화를 걸었고, 땀흘려 노력하는 그에게 격려도 잊지 않았다, 졸업 후에도 일 년이면 몇 번씩 자연스럽게 부모를 만났었다. 그 학생은 자발성을 갖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하고 있고, 부모는 만날 때마다 학교 자랑을 입이 닳도록 하고 있었다. “신부님, 그 놈이 말입니다. 그 놈이 전학시켜 달라고 했던 이유가 자기를 귀찮게 하는 동료들이나 선배들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이 부적응 때문에 꾸민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그 놈이 말했던 아이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왕따 당하고, 폭력에 시달렸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시의 자기 부적응의 한계를 피해 도망가고 싶어 만들어 낸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고 실토했다. 만일 당시 아들 말만을 듣고 학교를 원망했다면 지금도 학교를 원망하고, 아들을 미워하며 그 놈의 부적응을 보며 원수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그 놈이 또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학교에서 자기가 설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힘이 되어 준 양업과 동료 친구들이 고맙다고요. 제가 무대에 오른 것은 기숙사 생활에서 한 방을 쓰던 동료들이 저의 한계를 극복하도록 댄스를 가르치기로 음모를 꾸민 덕분이지요. 덕분에 무대에 오른 것이고요. 양업은 저를 괴롭히지 않았고 동료로 맞이해준 좋은 학교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장한 또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졸업앨범을 꺼냈다. 그 학생이 변화된 것은 의리 있는 기숙사 방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이 어우러져 만든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