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과 교육병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57 | 작성일 : 2011년 1월 31일
구제역과 교육병
구제역은 연례행사처럼 창궐한다. 추위가 맹위를 떨친 2011의 1월은 구제역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 전염 속도가 너무 엄청나, 나라전체가 피나는 방역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확산되었다. 자식 같은 생명을 땅에 묻는 ‘생매장, 살 처분’은 소문으로 들어도 소름끼친다. 거기에다 조류 인플루엔자(AI)까지 가세하여 축산농가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나라 분위기는 흉흉하다. 새해를 시작하며 연일 전해지는 구제역 소식은 숙으러들지 않는다.
주거환경이 아파트 문화로 바뀌고, 여유를 갖던 교육도 단일 종으로 초일류를 만들 목적으로, 그래서 출세 지향적 사고에 편승하며 교육은 목적 없이 학생을 공장이라는 교실에 담고 생산수단 정도로 대하며 강제하며 경쟁을 부추겼다. 가축은 집단 사육에 시달리며 한정된 장소에서 운동량을 최소화하며 강제 식을 먹였다. 오르지 생산을 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가축이 이용당한 생명이 되어 비참했다. 구제역으로 가축이 죽어갔고, 인간 생명도 각종 질병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좁은 축사는 생산 공장처럼 닮아 혹사당하는 가축의 생명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이런 공장식 축사에서 미래에 과연 무슨 일이 생겨날까? 마냥 궁금했다. 돼지와 비육우는 축사에서 강제 사육으로 지내야 했고 동물의 눈망울을 바라보는 사육자는 그 불쌍함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국식 축산농가기반이나 시설원예 기반도, 학생을 교육하는 교육기반도 어쩌면 그리 닮았는가. 토지 이용률을 최대로 높일 속셈으로 생산만을 목적으로 생명이 수단으로 취급당한다. 왜 재앙 같은 구제역 질병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병충해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살충, 살균제를 무차별적으로 생명에게 뿌려대는지 소비자은 그 해를 전혀 알 길이 없다. 이게 어디 대한민국의 일류재배이고, 일류사육이고, 일류교육이란 말인가.
내가 직접 토끼를 길러본 적이 있다. 사육환경이 열악하면 할수록 집단사육의 현장에서 토끼의 증식은 계산대로 증식되지 못함을 경험했다. 아파트 식의 토사는 250마리 이상 증식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육환경이 매우 열악해 각종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구제역은 어쩌면 인간이 만든 육류 소비 병에서 비롯된 인재로써 큰 재앙이다. 한국만이 이런 방법을 고집한다. 뉴질랜드, 일본, 호주를 가보라. 너른 평야, 푸른 초원, 넉넉한 사육환경이 한 마리당 일정면적을 지녀야 사육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들 각 생명은 목적으로 대우받으며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었다. 한국의 집단사육 농가에 가보면 가축분뇨 위에 뒹구는 젖소를 보며, 그 오물 묻은 유방에서 착유기를 들여대고 젖을 짜내는 모습을 지켜보라. 과연 우유를 먹을 맛이 나겠는가. 신토불이도 모든 여건이 준비된 상태에서 외쳐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의 이 구제역은 축산농가의 농업기반 판도를 다시 짜도록 촉구한다. 한우가 맛있고 돼지가 신토불이라고 말하며 무한생산을 꾀하지만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런 모습은 결코 글로벌 시대에 국제 경쟁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열악한 집단사육의 장에서 구제역으로 신음하다 살 처분 당한 가축처럼, 열악한 집단 교육현장에서 부적응이란 꼬리를 달고 신음하는 학생들이 모습은 서로 닮았다. 구제역 확산으로 가축 수백만 마리가 살 처분된 현실에 이것 말고 더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교육이다.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은 구제역의 원인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성찰을 촉구하고 나섰다. 집단사육, 되새김질 하는 여유로운 가축에게 집중적으로 먹이는 인공사료는 모든 생명에 대한 가혹행위이며, 구제역도 여기서 기인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강 주교는 “교회가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세상이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면서 “먹는 데에도 인간답게 먹고, 그리스도인답게 먹을 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생명은 마땅히 존중되어 먹이로 마련되어야 한다. 밤 10시까지의 자율학습, 공교육에 떠밀려 학원에서 새벽녘까지 지내는 학생을 바라보자. 다양한 인재 육성이란 시도교육청의 외침은 허울일 뿐 여전히 S대 몇 명 보내려고, 단일 고급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공장식 집단교육을 통해 지식을 먹고 있지 않는가. 요즘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개 연쇄 도살사건이 예사롭지 않다. 교육의 현실이 열악하고 인재를 만든다고 하지만 이런 병들어가는 사람을 만들고 있음을 직시하라. 구제역과 우리 현실인 교육 병은 미래에 모든 생명이 기반부터 위협 받을 수도 있다는 예고로, 인간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
구제역은 연례행사처럼 창궐한다. 추위가 맹위를 떨친 2011의 1월은 구제역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 전염 속도가 너무 엄청나, 나라전체가 피나는 방역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확산되었다. 자식 같은 생명을 땅에 묻는 ‘생매장, 살 처분’은 소문으로 들어도 소름끼친다. 거기에다 조류 인플루엔자(AI)까지 가세하여 축산농가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나라 분위기는 흉흉하다. 새해를 시작하며 연일 전해지는 구제역 소식은 숙으러들지 않는다.
주거환경이 아파트 문화로 바뀌고, 여유를 갖던 교육도 단일 종으로 초일류를 만들 목적으로, 그래서 출세 지향적 사고에 편승하며 교육은 목적 없이 학생을 공장이라는 교실에 담고 생산수단 정도로 대하며 강제하며 경쟁을 부추겼다. 가축은 집단 사육에 시달리며 한정된 장소에서 운동량을 최소화하며 강제 식을 먹였다. 오르지 생산을 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가축이 이용당한 생명이 되어 비참했다. 구제역으로 가축이 죽어갔고, 인간 생명도 각종 질병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좁은 축사는 생산 공장처럼 닮아 혹사당하는 가축의 생명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이런 공장식 축사에서 미래에 과연 무슨 일이 생겨날까? 마냥 궁금했다. 돼지와 비육우는 축사에서 강제 사육으로 지내야 했고 동물의 눈망울을 바라보는 사육자는 그 불쌍함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국식 축산농가기반이나 시설원예 기반도, 학생을 교육하는 교육기반도 어쩌면 그리 닮았는가. 토지 이용률을 최대로 높일 속셈으로 생산만을 목적으로 생명이 수단으로 취급당한다. 왜 재앙 같은 구제역 질병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병충해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살충, 살균제를 무차별적으로 생명에게 뿌려대는지 소비자은 그 해를 전혀 알 길이 없다. 이게 어디 대한민국의 일류재배이고, 일류사육이고, 일류교육이란 말인가.
내가 직접 토끼를 길러본 적이 있다. 사육환경이 열악하면 할수록 집단사육의 현장에서 토끼의 증식은 계산대로 증식되지 못함을 경험했다. 아파트 식의 토사는 250마리 이상 증식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육환경이 매우 열악해 각종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구제역은 어쩌면 인간이 만든 육류 소비 병에서 비롯된 인재로써 큰 재앙이다. 한국만이 이런 방법을 고집한다. 뉴질랜드, 일본, 호주를 가보라. 너른 평야, 푸른 초원, 넉넉한 사육환경이 한 마리당 일정면적을 지녀야 사육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들 각 생명은 목적으로 대우받으며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었다. 한국의 집단사육 농가에 가보면 가축분뇨 위에 뒹구는 젖소를 보며, 그 오물 묻은 유방에서 착유기를 들여대고 젖을 짜내는 모습을 지켜보라. 과연 우유를 먹을 맛이 나겠는가. 신토불이도 모든 여건이 준비된 상태에서 외쳐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의 이 구제역은 축산농가의 농업기반 판도를 다시 짜도록 촉구한다. 한우가 맛있고 돼지가 신토불이라고 말하며 무한생산을 꾀하지만 이제 그런 방식으로는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런 모습은 결코 글로벌 시대에 국제 경쟁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열악한 집단사육의 장에서 구제역으로 신음하다 살 처분 당한 가축처럼, 열악한 집단 교육현장에서 부적응이란 꼬리를 달고 신음하는 학생들이 모습은 서로 닮았다. 구제역 확산으로 가축 수백만 마리가 살 처분된 현실에 이것 말고 더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교육이다. 강우일 주교회의 의장은 구제역의 원인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성찰을 촉구하고 나섰다. 집단사육, 되새김질 하는 여유로운 가축에게 집중적으로 먹이는 인공사료는 모든 생명에 대한 가혹행위이며, 구제역도 여기서 기인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강 주교는 “교회가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세상이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면서 “먹는 데에도 인간답게 먹고, 그리스도인답게 먹을 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생명은 마땅히 존중되어 먹이로 마련되어야 한다. 밤 10시까지의 자율학습, 공교육에 떠밀려 학원에서 새벽녘까지 지내는 학생을 바라보자. 다양한 인재 육성이란 시도교육청의 외침은 허울일 뿐 여전히 S대 몇 명 보내려고, 단일 고급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공장식 집단교육을 통해 지식을 먹고 있지 않는가. 요즘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개 연쇄 도살사건이 예사롭지 않다. 교육의 현실이 열악하고 인재를 만든다고 하지만 이런 병들어가는 사람을 만들고 있음을 직시하라. 구제역과 우리 현실인 교육 병은 미래에 모든 생명이 기반부터 위협 받을 수도 있다는 예고로, 인간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