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멍에때문에 내가 있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13 | 작성일 : 2011년 7월 6일
그 분의 ‘멍에’ 때문에 내가 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철에 햇볕이 반짝 들었다. 시골에서 감자를 캔다기에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농부들은 ‘때는 이때다!’ 하며 모두들 감자 수확에 매달렸다. 어찌나 습도가 높고 바람 한 점 없는지 숨이 턱턱 막혔다. 땅 속의 감자는 줄기를 잡고 호미질을 할 때마다 굵은 감자알이 데굴데굴 속살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어린아이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마치 흥부가 박을 켤 때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오 듯, 어른들이 호미질을 할 때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감자가 신기했나 보다. 밭이랑마다 실한 감자알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감자를 크기 별로 박스에 채워 넣었다. 땀이 비 오듯 눈 사이로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 어설펐지만 수고했다며, 주인은 그날 점심을 걸쭉한 영양탕으로 준비해주었다. 부실한 일의 양에 비해 너무 잘 먹은 것이다. 일손을 덜어주려고 덤벼든 일이지만, 마음과 몸이 서로 달라 오히려 미안했다. 내가 감자를 캐러 갔는데 감자를 캤다기보다, 농부들이 마음을 읽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간다 하니 주인은 나에게 감자를 넉넉하게 담아주었다. 농부는 넉넉하고 부유한 마음을 가득 담아 준 것이다. ‘바보’ 같은 마음을 지닌 농부들 때문에 우리가 편히 살아감을 실감했다. 농부와 나 사이에 고마움의 연결성 없이 내 능력처럼 잘 먹고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일고, 농부의 마음을 만나 것이 무엇보다 기쁜 하루였다.
언젠가 보았던 휴먼영화 ‘워낭소리’가 생각났다. 송아지가 좀 자라서 코뚜레에 고삐를 달고, 일소로 길들여진 소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멍에를 메고 헌신하였던 모습,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 낳고 자녀를 위해 멍에를 매고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났다. 워낭소리를 들으며 고락을 함께 했던 일소가 더 이상 워낭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멍에가 제거되며 생명을 다해가는 소의 희생과, 또한 자식들을 위해 지고 멍에를 지고 살았던 아버지도 기력이 쇄진해지고 자식 곁을 떠나는 아버지의 숭고함을 읽었다. 새 송아지에 밀려 힘을 잃어가는 늙은 소와 생생한 자식들의 웃음소리 이면으로 죽음을 앞두신 아버지의 모습은 훌쩍 자란 자식들에게 그 고마움이 서로 연결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 29-30)” 예수님은 일생 우리 구원을 위해 멍에를 메시고 사신 분이셨지만, 그가 지고 산 짐은 편하고 가볍고 자유롭게 여기셨다. 그분께서 일생을 지고 사신 멍에의 극점인 십자가의 수난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서 캔다면, 어린 아이가 줄줄이 이어 나오는 감자를 보고 놀라 기뻐하는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멍에를 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바보 농사꾼, 오르지 밀을 위해 멍에를 메고 살아갔던 일소, 자녀를 위해 짊어진 아버지의 무거운 짐, 그러나 그분들의 짐은 우리에게 편안하고 가볍게 보였다. 오히려 우리가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불만을 더 많이 터트리며 살았음을 반성한다.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그래서 멍에의 의미를 연결하지 못한 채 내 멍에가 무겁다고 원망할 뿐이다. 감자를 캐러가서 얻은 농부의 마음에서 멍에가 가볍고 편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돌아 와서 기쁘다. 기도 중에 우리의 생명이 되도록 도와주신 분들의 멍에에 대한 수고를 생각하며 기도해야겠다. 또한 예수님이 지고 사신 ‘멍에’의 의미를 기도 속에서 더 캐야하겠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철에 햇볕이 반짝 들었다. 시골에서 감자를 캔다기에 반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농부들은 ‘때는 이때다!’ 하며 모두들 감자 수확에 매달렸다. 어찌나 습도가 높고 바람 한 점 없는지 숨이 턱턱 막혔다. 땅 속의 감자는 줄기를 잡고 호미질을 할 때마다 굵은 감자알이 데굴데굴 속살을 보였다. 이를 지켜보던 어린아이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마치 흥부가 박을 켤 때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오 듯, 어른들이 호미질을 할 때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는 감자가 신기했나 보다. 밭이랑마다 실한 감자알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감자를 크기 별로 박스에 채워 넣었다. 땀이 비 오듯 눈 사이로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하는 일이 어설펐지만 수고했다며, 주인은 그날 점심을 걸쭉한 영양탕으로 준비해주었다. 부실한 일의 양에 비해 너무 잘 먹은 것이다. 일손을 덜어주려고 덤벼든 일이지만, 마음과 몸이 서로 달라 오히려 미안했다. 내가 감자를 캐러 갔는데 감자를 캤다기보다, 농부들이 마음을 읽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간다 하니 주인은 나에게 감자를 넉넉하게 담아주었다. 농부는 넉넉하고 부유한 마음을 가득 담아 준 것이다. ‘바보’ 같은 마음을 지닌 농부들 때문에 우리가 편히 살아감을 실감했다. 농부와 나 사이에 고마움의 연결성 없이 내 능력처럼 잘 먹고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일고, 농부의 마음을 만나 것이 무엇보다 기쁜 하루였다.
언젠가 보았던 휴먼영화 ‘워낭소리’가 생각났다. 송아지가 좀 자라서 코뚜레에 고삐를 달고, 일소로 길들여진 소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멍에를 메고 헌신하였던 모습, 그리고 결혼하여 자녀 낳고 자녀를 위해 멍에를 매고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났다. 워낭소리를 들으며 고락을 함께 했던 일소가 더 이상 워낭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멍에가 제거되며 생명을 다해가는 소의 희생과, 또한 자식들을 위해 지고 멍에를 지고 살았던 아버지도 기력이 쇄진해지고 자식 곁을 떠나는 아버지의 숭고함을 읽었다. 새 송아지에 밀려 힘을 잃어가는 늙은 소와 생생한 자식들의 웃음소리 이면으로 죽음을 앞두신 아버지의 모습은 훌쩍 자란 자식들에게 그 고마움이 서로 연결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 29-30)” 예수님은 일생 우리 구원을 위해 멍에를 메시고 사신 분이셨지만, 그가 지고 산 짐은 편하고 가볍고 자유롭게 여기셨다. 그분께서 일생을 지고 사신 멍에의 극점인 십자가의 수난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서 캔다면, 어린 아이가 줄줄이 이어 나오는 감자를 보고 놀라 기뻐하는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멍에를 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바보 농사꾼, 오르지 밀을 위해 멍에를 메고 살아갔던 일소, 자녀를 위해 짊어진 아버지의 무거운 짐, 그러나 그분들의 짐은 우리에게 편안하고 가볍게 보였다. 오히려 우리가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불만을 더 많이 터트리며 살았음을 반성한다. 예수님 따로, 나 따로 그래서 멍에의 의미를 연결하지 못한 채 내 멍에가 무겁다고 원망할 뿐이다. 감자를 캐러가서 얻은 농부의 마음에서 멍에가 가볍고 편하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돌아 와서 기쁘다. 기도 중에 우리의 생명이 되도록 도와주신 분들의 멍에에 대한 수고를 생각하며 기도해야겠다. 또한 예수님이 지고 사신 ‘멍에’의 의미를 기도 속에서 더 캐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