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을 보며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93 | 작성일 : 2009년 12월 11일

내 얼굴을 보며

  한해의 끝자락 12월, 구성원 모두가 짬을 내어 예수님을 한가운데 모시고 둘러앉았다. 한해를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서다. 모임 주제는 “나의 얼굴”이다. 사회자는 잠시 눈을 감고 내가 살아 온 삶을 떠올려보라고 주문했다. 순간 내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 나와 관련지어진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편안한 미소를 짓게 하는 좋은 느낌의 얼굴과 일들, 불안과 갈등을 자아내는 느낌들이 교차하였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면 심기가 불편해진 찌그러진 얼굴이 되기도 했다.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눈을 뜨고는 이내 얼굴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준비물은 석고가 묻은 천 조각, 물이 담긴 컵 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루고 석고천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얼굴을 본뜨는 작업이었다. 석고가 묻은 조각 천을 물속에 잠깐 넣었다 꺼내 물을 꾹 짜내고, 조각 천을 잘 펼쳐서 상대방 얼굴선을 따라 정성을 다해 붙여가며 정교하게 다듬어 갔다. 시간이 지나자 조각천은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고 이내 조각천은 말라갔다. 묽은 석고는 다시 고체화되었고, 얼굴 본은 조심스레 떼어져 예수님이 모셔진 장소로 모아졌다.
 사회자는 만들어진 얼굴을 잠시 동안 바라보라고 지시했다. 조직 구성원 모두가 협력해서 만든 얼굴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정교하게 다듬어서인지, 평소에 마음씨가 좋아서, 아니면 착한 일을 많이 해서인지 환한 얼굴들이 미소를 머금었다. 부럽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인간과 일들 속에 만들어진 ‘내 얼굴’의 진면모를 보는 것 같아 묘한 느낌을 갖게 했고, 내 얼굴에 묻어나는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사회자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듯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바삐 살아온 날들이 지금의 ‘내 얼굴’을 만들었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도 하고 씁쓸하고 후회스럽다.
 한해의 끝자락 12월, 짧은 작업의 시간이지만 내가 삶 안에서 만났던 사람들, 내가 접한 일들을 돌아보게 해주어 감사하고 은혜롭다. 또한 함께 삶을 나눈 구성원들과 친구들, 가족관계, 오고 가는 모든 순간의 일들로 ‘나의 얼굴’이 작품이 되어 나타났다.
 생을 다한 분들에게 “당신에게 일주일을 더 살게 그 분께서 허락한다면 당신은 제일 먼저 어떤 일을 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사랑’, ‘여행’, ‘나눔’ 이란 단어를 제일 많이 떠올렸다고 한다. “배우자를 더 잘 사랑해주겠다. 그와 함께 여유를 갖고 여행을 떠나겠다. 강가에서 낚시를 즐기겠다.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걷겠다. 내 재산을 이웃에게 나누고 기부할 것이다.” 그분들의 답에는 삶의 본질이 무엇이고, 인간 실존의 중요한 가치들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일깨워주는 듯했다. 어쩌면 이 답의 정도에 따라 인간다운 진실 된 자기 얼굴 을 만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새해 첫 시간,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을 보며 시작했던 한 해, 과연 ‘나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남아있는 걸까? 거창하게 요란하게 시작했던 그 시간이 지금은 용두사미가 되어 또 초라한 한 해를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한해를 잘 시작하려는 기원에서의 일출도 좋지만, 한해를 마감하는 ‘나의 얼굴’이 석양처럼 아름다웠으면 한다. 한 해의 맨 끝자락에 서있는 지금, 사람이 간직하고 살아야할 삶의 본질, 인간 존재의미, 실존의 중요한 가치들이 만들어준 뚜렷하게 빛나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내 안에서 한해가 가져다준 석양이 주는 의미가 살아나야 새해의 일출도 더욱 생생하게 맞이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