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에 시달리는 이 나라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36 | 작성일 : 2010년 6월 2일
중풍에 시달리는 나라
‘중풍’은 뇌의 손상에서 비롯되기에 몸의 지체들이 마비되거나 우둔하여 불편한 병이다. 나는 학교를 설립하고 상처받은 여러 유형의 학생들을 만났었다. 한 유형의 학생들을 일관되게 만나 교육하는 것도 힘든데, 다양한 상처의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 교육하였으니 교육이 힘들 뿐 아니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 일이었다. 나는 이런 학생들의 행동을 보고 ‘중풍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께 들여다 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없어 지봉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시켜 주셨다.”(루카 5,18-19) 나는 이 성서구절을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을 자세히 살피는 과정에서 지봉의 기와를 벗겨 내려 보낼 정도로 상황이 복잡했고, 그렇게 하기까지 중풍병자의 치유를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군중 때문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그들 율사들의 위선적 행동이 심하게 왜곡되어 그들 마음이 중풍에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중들 속에 소위 지도자라는 율법학자들, 종교 지도자들, 바리사이들의 독선적 아집은, 육체적인 중풍을 앓고 있는 환자보다 더 큰 마음의 중풍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중풍병자의 치유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선의의 도우미들이 과감하게 나서서 중풍병자를 들 것에 눕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기와를 벗기고 내려 보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갸륵한 노력을 보게 되었고, 도우미들의 선행과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치유해 주셨다.
나는 학생들을 깊이 만나면서부터 이 성서구절이 온통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마음이 혼란스런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는 데, 그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간절히 치유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낫기를 바라는 학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치유를 가로막는 미성숙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 학생들이 딱하게도 중풍이 걸렸구나.’ 라는 생각과 이들의 심각한 중풍의 치유를 위해 내가 곱지 않은 시선을 극복하고 선의의 도우미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이 땅에는 무슨 바람이 그리도 많은지. 이는 중풍(中風)이 아니라, 중풍(重風)이며 또한 병풍(病風)이었다. 이런 바람 때문에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풍(北風)이다. 동강 난 남과 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절에 관계없이 냉풍이 몰아친다. 그 뿐이랴, 3김 시대가 만든 동서풍이 오늘도 여전히 불어댄다. 거기에다 신(新)바람인 노풍도 있었다. 이 나라에 이런 바람이 중풍이 되어 뒤엉켜 불었다. 이번 6.2 지방선거에서도 정책대결은 실종되고 병든 바람만 불었다. 어쩌면 바람이 황사보다 더 진한 흑사가 불었다는 느낌이다. 아직도 이 나라 지도자들은 페어플레이가 아닌 이전투구처럼 서로를 물고 뜯고 씹고, 맛보고 즐겼다. 이는 어느 광고회사의 약 선전에 나오는 로고송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의 그런 희망적인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남 안되기를 좋아하고 남의 약점만을 골라 좁아터진 비방만 일삼는 흑풍이었다. 기득권자, 소위 지도자들이 만든 중풍은 국민들에게 혼란스런 중풍에 시달리게 만들고는 국민들은 이상한 기류를 따라 눈치만 보게 한다.
이제 지도자가 더 이상 국민들에게 중풍의 원인이 되질 않았으면 한다. 선거 이후 자격이 주어진 선거 당선자는 그 권한이 보다 더 모든 이를 향하여 잘 사용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권한은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하고, 책임은 자기가 맡은 국민과 주민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량이 되어야 한다. 도지사는 도민을 위해, 시장과 군수는 시민과 군민을 위해, 지역 의원들은 지역 주민을 위해, 교육감과 교육위원은 진정한 교육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청주, 청원의 통합도, 세종시 문제도, 4대강에 대한 심각한 문제도 당과 자신의 이권만을 위해 권력이 행사되지 않기를 바란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중풍이 걸린 그런 지도자의 눈치를 보는 중풍 걸린 국민이 되질 않기를 바란다. 모든 지도자들이 건강할 때 국민들도 중풍에서 치유되어 건강해짐을 명심하길 바란다. 만일 지도자가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국민이 일어나 정의를 위해 소리 지를 것이다. 그런 경우 자신은 물론 가문도 명예스럽지 못할 것이고 중풍을 추스르다 처절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중풍’은 뇌의 손상에서 비롯되기에 몸의 지체들이 마비되거나 우둔하여 불편한 병이다. 나는 학교를 설립하고 상처받은 여러 유형의 학생들을 만났었다. 한 유형의 학생들을 일관되게 만나 교육하는 것도 힘든데, 다양한 상처의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 교육하였으니 교육이 힘들 뿐 아니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 일이었다. 나는 이런 학생들의 행동을 보고 ‘중풍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께 들여다 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없어 지봉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시켜 주셨다.”(루카 5,18-19) 나는 이 성서구절을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을 자세히 살피는 과정에서 지봉의 기와를 벗겨 내려 보낼 정도로 상황이 복잡했고, 그렇게 하기까지 중풍병자의 치유를 가로막는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군중 때문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그들 율사들의 위선적 행동이 심하게 왜곡되어 그들 마음이 중풍에 걸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군중들 속에 소위 지도자라는 율법학자들, 종교 지도자들, 바리사이들의 독선적 아집은, 육체적인 중풍을 앓고 있는 환자보다 더 큰 마음의 중풍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중풍병자의 치유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선의의 도우미들이 과감하게 나서서 중풍병자를 들 것에 눕혀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기와를 벗기고 내려 보낼 수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갸륵한 노력을 보게 되었고, 도우미들의 선행과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는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치유해 주셨다.
나는 학생들을 깊이 만나면서부터 이 성서구절이 온통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학교에서 마음이 혼란스런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는 데, 그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간절히 치유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낫기를 바라는 학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치유를 가로막는 미성숙한 사람들이 있었음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 학생들이 딱하게도 중풍이 걸렸구나.’ 라는 생각과 이들의 심각한 중풍의 치유를 위해 내가 곱지 않은 시선을 극복하고 선의의 도우미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이 땅에는 무슨 바람이 그리도 많은지. 이는 중풍(中風)이 아니라, 중풍(重風)이며 또한 병풍(病風)이었다. 이런 바람 때문에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풍(北風)이다. 동강 난 남과 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절에 관계없이 냉풍이 몰아친다. 그 뿐이랴, 3김 시대가 만든 동서풍이 오늘도 여전히 불어댄다. 거기에다 신(新)바람인 노풍도 있었다. 이 나라에 이런 바람이 중풍이 되어 뒤엉켜 불었다. 이번 6.2 지방선거에서도 정책대결은 실종되고 병든 바람만 불었다. 어쩌면 바람이 황사보다 더 진한 흑사가 불었다는 느낌이다. 아직도 이 나라 지도자들은 페어플레이가 아닌 이전투구처럼 서로를 물고 뜯고 씹고, 맛보고 즐겼다. 이는 어느 광고회사의 약 선전에 나오는 로고송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의 그런 희망적인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남 안되기를 좋아하고 남의 약점만을 골라 좁아터진 비방만 일삼는 흑풍이었다. 기득권자, 소위 지도자들이 만든 중풍은 국민들에게 혼란스런 중풍에 시달리게 만들고는 국민들은 이상한 기류를 따라 눈치만 보게 한다.
이제 지도자가 더 이상 국민들에게 중풍의 원인이 되질 않았으면 한다. 선거 이후 자격이 주어진 선거 당선자는 그 권한이 보다 더 모든 이를 향하여 잘 사용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권한은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하고, 책임은 자기가 맡은 국민과 주민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량이 되어야 한다. 도지사는 도민을 위해, 시장과 군수는 시민과 군민을 위해, 지역 의원들은 지역 주민을 위해, 교육감과 교육위원은 진정한 교육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청주, 청원의 통합도, 세종시 문제도, 4대강에 대한 심각한 문제도 당과 자신의 이권만을 위해 권력이 행사되지 않기를 바란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중풍이 걸린 그런 지도자의 눈치를 보는 중풍 걸린 국민이 되질 않기를 바란다. 모든 지도자들이 건강할 때 국민들도 중풍에서 치유되어 건강해짐을 명심하길 바란다. 만일 지도자가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는 국민이 일어나 정의를 위해 소리 지를 것이다. 그런 경우 자신은 물론 가문도 명예스럽지 못할 것이고 중풍을 추스르다 처절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