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慰靈聖月)의 단상(斷想)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하여, 죽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묘소를 찾아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에,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코헬렛 3,2) 그러한 ‘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중 ‘죽음’은 한 삶의 마무리이기에 더 소중히 여겨야 하며 이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금년에는 어른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 그 분들의 생애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분들께로 모여들었다. 국민들은 그 분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으로 애잔해서, 또 그들의 인간적인 삶이 너무나 슬퍼서 모여들기도 했다. 또한 가시관을 쓰고 살다 떠나신 불꽃을 보려고, 생애 속에 담긴 교훈을 만나려 애도하기도 했다. 그분들은 이제 세상을 떠나 한 분은 성직자 묘원에, 한 분은 고향 뒷동산 후원에, 또 다른 한 분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어쨌든 그 분들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 두 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죽음을 맞이해 정치사에 이름을 남겼고, 하느님을 향하여, 이웃을 위하여 생을 바치신 추기경님은, 국민들 마음속에 생명의 샘으로 살아계시다.
얼마 전,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어머니 같은 수도자 한 분이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분을 떠나보내고 몇 달이 지난 11월의 어느 날은 그 분을 보고 싶었다. 작은 기도지만 그분에게 드리고 싶어서였다. 원로 수녀님들과 함께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묘소 앞에서 그 분을 위해 연도를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이름 석 자와 수도명, 출생과 수도자가 된 날, 생을 졸업한 날 외에는 그 어떤 화려한 문구 한 줄도 없었다. 그 분의 죽음이 이름 석 자만 남겨놓고 떠나신 것 같지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했던 모든 이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퍼 올리는 영성의 존재로 우리 곁에 살아나고 있다.
마침 찾아간 그 곳에서 ‘김수환 추기경님’도 만날 수 있었다. 영성의 깊이 있는 기도의 힘으로 혼란한 세상에 사랑의 질서를 회복한 참다운 목자! 가난한 자들과 늘 함께한 숭고한 사제! 하느님을 향하여, 인간을 위하여 온전히 사제로서의 삶을 사신 그 분과의 만남은, 푹 썩은 땅에서 생명력 넘치는 생명이 움터 나오듯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객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옮아감이다.”(요한 5.24) 라는 성서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추기경님의 자리에서 진정한 부활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암 병동 환자들’의 얼굴도 본다. 많은 환자들이 항암 탓인가 뼈만 앙상하고 가죽만 남아있다. 요즘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안락사’가 미화되어 ‘존엄사’라 하지만, 인륜도 저버리는 자녀들로부터 자행되는 무자비한 죽음 문화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자녀들이 의사에게 소곤대며 “존엄사 합시다.”라고 말한다. 산소호흡기를 제거 하고는 “편하게 해드렸어!”라고 친구에게 자랑하듯 말을 한다. 정말이지 자비의 탈을 쓴 공개적인 살인이다. 세상은 어찌 그리 법해석을 자기 식으로 하여 부모에게 그렇게 보답하는가. 세상의 생각은 너무 이기적이고 약삭빠르다.
이에 반해 끝까지 죽음에 대해 고통에 직면하는 이도 있고, ‘자녀다운 효성’을 다하는 자녀들이 있다. 죽음이 결코 인간의 권리와 선택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임을 알기에, 끝까지 고통과 직면하다가 하느님께로 귀향(돌아감)하는 분들이 그들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광채가 나고 훈훈하기까지 하다.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라며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값진 선물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렛 3,11)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날, 그 분 앞에 보여 줄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11월이 다해가는 위령의 달을 지내면서 언젠가 내 일이 될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때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의 죽음을 보러 많은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과연 나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생명이 될 ‘영성’이란 아름다움을 선물할 수 있을까? 11월이 다해가는 오늘, 묘비에 쓰인 “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명구가 떠오른다. 나에게도 밀어닥칠 죽음이,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처럼 뭇 사람들에게 들어 올려질 아름다운 모습을 준비해야겠다. 예수님을 닮은 그래서 ‘영성’이란 값진 것을 퍼내주시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모습처럼,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다간 한 수도자처럼, 우리의 삶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준비했으면 한다.
가톨릭교회는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하여, 죽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묘소를 찾아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에,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코헬렛 3,2) 그러한 ‘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중 ‘죽음’은 한 삶의 마무리이기에 더 소중히 여겨야 하며 이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금년에는 어른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 그 분들의 생애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분들께로 모여들었다. 국민들은 그 분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으로 애잔해서, 또 그들의 인간적인 삶이 너무나 슬퍼서 모여들기도 했다. 또한 가시관을 쓰고 살다 떠나신 불꽃을 보려고, 생애 속에 담긴 교훈을 만나려 애도하기도 했다. 그분들은 이제 세상을 떠나 한 분은 성직자 묘원에, 한 분은 고향 뒷동산 후원에, 또 다른 한 분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어쨌든 그 분들은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한다. 두 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죽음을 맞이해 정치사에 이름을 남겼고, 하느님을 향하여, 이웃을 위하여 생을 바치신 추기경님은, 국민들 마음속에 생명의 샘으로 살아계시다.
얼마 전,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어머니 같은 수도자 한 분이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분을 떠나보내고 몇 달이 지난 11월의 어느 날은 그 분을 보고 싶었다. 작은 기도지만 그분에게 드리고 싶어서였다. 원로 수녀님들과 함께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묘소 앞에서 그 분을 위해 연도를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이름 석 자와 수도명, 출생과 수도자가 된 날, 생을 졸업한 날 외에는 그 어떤 화려한 문구 한 줄도 없었다. 그 분의 죽음이 이름 석 자만 남겨놓고 떠나신 것 같지만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했던 모든 이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퍼 올리는 영성의 존재로 우리 곁에 살아나고 있다.
마침 찾아간 그 곳에서 ‘김수환 추기경님’도 만날 수 있었다. 영성의 깊이 있는 기도의 힘으로 혼란한 세상에 사랑의 질서를 회복한 참다운 목자! 가난한 자들과 늘 함께한 숭고한 사제! 하느님을 향하여, 인간을 위하여 온전히 사제로서의 삶을 사신 그 분과의 만남은, 푹 썩은 땅에서 생명력 넘치는 생명이 움터 나오듯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객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있었다.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옮아감이다.”(요한 5.24) 라는 성서구절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추기경님의 자리에서 진정한 부활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암 병동 환자들’의 얼굴도 본다. 많은 환자들이 항암 탓인가 뼈만 앙상하고 가죽만 남아있다. 요즘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안락사’가 미화되어 ‘존엄사’라 하지만, 인륜도 저버리는 자녀들로부터 자행되는 무자비한 죽음 문화가 다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자녀들이 의사에게 소곤대며 “존엄사 합시다.”라고 말한다. 산소호흡기를 제거 하고는 “편하게 해드렸어!”라고 친구에게 자랑하듯 말을 한다. 정말이지 자비의 탈을 쓴 공개적인 살인이다. 세상은 어찌 그리 법해석을 자기 식으로 하여 부모에게 그렇게 보답하는가. 세상의 생각은 너무 이기적이고 약삭빠르다.
이에 반해 끝까지 죽음에 대해 고통에 직면하는 이도 있고, ‘자녀다운 효성’을 다하는 자녀들이 있다. 죽음이 결코 인간의 권리와 선택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임을 알기에, 끝까지 고통과 직면하다가 하느님께로 귀향(돌아감)하는 분들이 그들이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광채가 나고 훈훈하기까지 하다.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라며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는 값진 선물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코헬렛 3,11)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날, 그 분 앞에 보여 줄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11월이 다해가는 위령의 달을 지내면서 언젠가 내 일이 될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때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의 죽음을 보러 많은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과연 나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생명이 될 ‘영성’이란 아름다움을 선물할 수 있을까? 11월이 다해가는 오늘, 묘비에 쓰인 “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명구가 떠오른다. 나에게도 밀어닥칠 죽음이,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처럼 뭇 사람들에게 들어 올려질 아름다운 모습을 준비해야겠다. 예수님을 닮은 그래서 ‘영성’이란 값진 것을 퍼내주시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모습처럼, 소박하고 겸손하게 살다간 한 수도자처럼, 우리의 삶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준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