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노래함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033 | 작성일 : 2010년 4월 9일
부활을 노래함
찬바람 맞으며 겨울을 이겨낸 생명들, 그 생명들이 꽃망울 터트리며 봄을 노래한다. 유독 추웠던 지난겨울은 마음속까지 추었었다. 봄이 오나 싶어 목을 빼다가 눈 내리고 비바람치고, 추위가 찾아와서는 오는 봄이 칙칙하고 지루했다. 산책길에서 경칩이 지났다고 착각한 개구리가 따스한 봄기운에 봄비 맞으며 노래하다가 한방 얻어맞고는 질겁했다. 이렇게 겨울이 길게 늘어져 봄을 시샘했다.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모두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도 추위에 견디어 낸 생명은 장엄한 축제로 봄을 노래한다. 정채봉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큰 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구나.” 광야에서 견디어 낸 생명들은 봄이 더욱 실하다. 창가 양지바른 곳에 피어낸 수선화도, 우아한 백목련, 자목련 꽃망울이 아름답고 소담지다. 봄의 전령 산수유가 유치원 아이들처럼, 갓 태어난 햇병아리처럼 예쁘다. 아직은 산 나무들이 생명을 노래하기엔 칙칙한 겨울옷 입었지만은 산고의 소리를 들을 듯 생명을 틔워내고 있다. 이런 봄의 축제에 교회도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한다. 이런 때에 과연 진정한 부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부활은 생명의 시작에서 비롯된 생명의 완성이다. 삶이 때로는 평온하다가도 고통스러우며 정신이 있다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이제 정신 차리니 부활이 보이네요.” 한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나도 그분에게 답했다. “부활은 진정한 평화이며, 영혼의 정신 차림입니다.” 부활은 삶속에서 피어낸 생명의 꽃이다. 학생이 공부와 수행을 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지닌 생명을 드높여 부활시킴이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내면을 드높여 부활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는 부활을 이야기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육신의 부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몸에 치장하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출세를 위해 욕심 부리고, 명예와 권력으로 품위를 높이려 한다. 아프면 낳게 해달고 빌고 육신사욕에 매달린 부활을 꿈꾼다. 그런 ‘육신의 부활’ 말고, 진정한 부활이 있다면 무얼까? 마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여 누리는 영혼의 부활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그 영혼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차서 노래 부를 때,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활의 증인들을 살펴보자. 섬김을 받으려고 노력했던 지도자들, 육신을 치장하고 가꾼 권력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했다. 부활의 증인은 하느님께 향해 살았고, 길게만 느껴지던 삶의 여정에 자기를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왜 봄의 생명이 아름다운가? 긴 겨울을 이겨내려 광야에 내 몰린 생명은 우리 모두에게 감동이 되어 나타난다. 죄인이며, 창녀인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간음하다 걸린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영혼을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고 죄를 용서 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영혼 안에 담았다. 그 여인은 아름답게 피어난 영혼의 꽃이었다. 그 여인의 삶 속에는 이미 부활이 있었다. 그 여인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여인은 자연이 봄을 노래하듯 싱그러운 영혼이 되어 생생한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영혼에 영원한 생명담기’를 인내롭게 이루어가야 한다.
성금요일,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위대한 침묵」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자연 속에 자신을 놓고, 침묵 중에 생의 본질을 놓고 기도하는 수도자의 삶이 아름답다.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내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때 내 안에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살아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갈 것이다.
찬바람 맞으며 겨울을 이겨낸 생명들, 그 생명들이 꽃망울 터트리며 봄을 노래한다. 유독 추웠던 지난겨울은 마음속까지 추었었다. 봄이 오나 싶어 목을 빼다가 눈 내리고 비바람치고, 추위가 찾아와서는 오는 봄이 칙칙하고 지루했다. 산책길에서 경칩이 지났다고 착각한 개구리가 따스한 봄기운에 봄비 맞으며 노래하다가 한방 얻어맞고는 질겁했다. 이렇게 겨울이 길게 늘어져 봄을 시샘했다.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모두가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도 추위에 견디어 낸 생명은 장엄한 축제로 봄을 노래한다. 정채봉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큰 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구나.” 광야에서 견디어 낸 생명들은 봄이 더욱 실하다. 창가 양지바른 곳에 피어낸 수선화도, 우아한 백목련, 자목련 꽃망울이 아름답고 소담지다. 봄의 전령 산수유가 유치원 아이들처럼, 갓 태어난 햇병아리처럼 예쁘다. 아직은 산 나무들이 생명을 노래하기엔 칙칙한 겨울옷 입었지만은 산고의 소리를 들을 듯 생명을 틔워내고 있다. 이런 봄의 축제에 교회도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한다. 이런 때에 과연 진정한 부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부활은 생명의 시작에서 비롯된 생명의 완성이다. 삶이 때로는 평온하다가도 고통스러우며 정신이 있다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이제 정신 차리니 부활이 보이네요.” 한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나도 그분에게 답했다. “부활은 진정한 평화이며, 영혼의 정신 차림입니다.” 부활은 삶속에서 피어낸 생명의 꽃이다. 학생이 공부와 수행을 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지닌 생명을 드높여 부활시킴이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내면을 드높여 부활시키기 위함이다.
우리는 부활을 이야기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이 ‘육신의 부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몸에 치장하고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출세를 위해 욕심 부리고, 명예와 권력으로 품위를 높이려 한다. 아프면 낳게 해달고 빌고 육신사욕에 매달린 부활을 꿈꾼다. 그런 ‘육신의 부활’ 말고, 진정한 부활이 있다면 무얼까? 마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여 누리는 영혼의 부활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그 영혼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차서 노래 부를 때,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부활의 증인들을 살펴보자. 섬김을 받으려고 노력했던 지도자들, 육신을 치장하고 가꾼 권력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했다. 부활의 증인은 하느님께 향해 살았고, 길게만 느껴지던 삶의 여정에 자기를 하느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왜 봄의 생명이 아름다운가? 긴 겨울을 이겨내려 광야에 내 몰린 생명은 우리 모두에게 감동이 되어 나타난다. 죄인이며, 창녀인 일곱 마귀에 시달리며 간음하다 걸린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영혼을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고 죄를 용서 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영혼 안에 담았다. 그 여인은 아름답게 피어난 영혼의 꽃이었다. 그 여인의 삶 속에는 이미 부활이 있었다. 그 여인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 여인은 자연이 봄을 노래하듯 싱그러운 영혼이 되어 생생한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도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영혼에 영원한 생명담기’를 인내롭게 이루어가야 한다.
성금요일,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위대한 침묵」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자연 속에 자신을 놓고, 침묵 중에 생의 본질을 놓고 기도하는 수도자의 삶이 아름답다.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보이지 않는 내 영혼은 영원할 것이다. 내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때 내 안에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살아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