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부활이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45 | 작성일 : 2009년 4월 12일

야, 부활이다!

 칙칙하고 어두운 겨울을 벗는 시간이다. 버들가지가 눈 뜨고, 수양버들이 잎을 틔웠다. 야,  저것 봐라! 봄의 전령처럼 무거운 산자락은 엷은 그린green칠을 시작했다. 노란 산수유는 봄이 수줍은 듯 하고, 개나리는 갓 입학하고 세상구경 나온 유치원 아이들처럼 예쁘다. 아직도 조석으로 움츠린 겨울인데 백목련은 우아했다. 예년에 비해 10여일 일찍 시작한 벚꽃 축제는 28-9도의 이상 기온으로 웃음꽃을 보이다가 꽃잎을 날린다. 덕분에 잔디도 빠르게 싹을 틔웠다.
 칙칙하고 어두운 겨울 산처럼 ‘사순절’도 그랬다. 저 어두운 겨울날에도, 어둡기만 했던 사순절에도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마음 어린 사순절은 힘들고 무거웠다. 주일이면 “미사 가라!” 외쳐대시던 어머니의 권유가 귀찮고, 막상 간 미사는 성가 소리마저 듣기 싫으면서도 “예수님의 몸이다.”하니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아멘.”하고 받아먹었다. 성당에서 과자며 선물 받고 서로 어울려 노는 것이 사랑인줄 알았다. 발등에 떨어진 것만 가지고도 허둥대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주변을 살펴라, 사랑하고 감사해라.’ 는 말을 아무리 귀가 따갑도록 들어도 내 맘만 가지고 허덕대던 날들…. 조금 나이 들던 때에는, 사랑이란 이성교제로구나, 가슴 설레던 사랑만 있는 줄 알고 살았다. 조금 더 나이 들어서는 친구가 보이다가, 사랑이신 부모님이 조금씩 보였다. 오늘의 내 어머님을 바라본다.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시던 어머니, 이제 거동이 불편하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자리에 누워계신 채 묵주를 굴리고 계신 어머님을 보고 있다. 아! 어리석기도 하지. 이제야, 조금은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알 것 같다.
 중년을 넘는 사제로 지내는 성 목요일, 성금요일의 예수님의 최후만찬,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십자가 전례를 하며, 나는 갑자기 눈이 밝아졌고 순간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이었구나!’ 하고 가슴을 쳤다. 칙칙하고 어둡던 사순절은 아름다운 봄을 보는 것처럼 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순절 내내 그리고 성삼일이 시작되던 전례기간 동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를 줄곧 묵상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구원을 위해 어느 누구의 생명도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단적인 예로 창세기 22장1-19절(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을 꺼네보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22.2)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주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다시 이르신다.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창세2212-14) 아브라함의 마음엔 부활이 가득했을 것이다.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야훼 이레’ 즉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는 의미처럼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해골산에 세우시고 십자가의 참된 희생 제물로 세우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철저히 침묵하셨다. 그 희생제사 때문에  칙칙하고 어두운 겨울이 거치고, 칙칙하고 어두운 마음이 거치면 봄이 오고 부활이 온다. 칙칙한 겨울 산을 벗겨준 것도, 우리의 칙칙한 마음을 벗겨 준 것도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 덕분이었다. ‘하느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보스럽게 살고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시고 떠나신 고 김수환 추기경의 유언처럼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이제야 나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부활이다. 부활을 맞이하도록, 또 진정한 사랑을 배우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 너무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