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문제아인가?
모범의 잣대로 보면 공부 잘하고 어른들 말 잘 듣고 아무 탈 없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아니면 모두가 문제이다. 학교를 세우고 경제가 바닥을 치듯 삶의 바닥을 치는 학생들을 거듭 만났다. 모범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속이 뒤집히는 모습을 하는 학생들과 지냈다. 나는 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건강한 남녀노소들과 지냈을 뿐, 이런 학생들은 만나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이런 나에게 삶의 바닥을 치는 학생들과의 만남은, 지금 돌이켜보면 우연히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에 이런 뜻을 담아주신 덕분이다.
바닥을 치는 학생들의 삶 중에 性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하느님은 이런 학생들에게 큰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거룩함(聖)’을 넣어 그들을 아름답게 바꿔보라는 분부를 내게 내리셨다. 그들 청소년들의 만남은 내가 겪은 고통 중에 가장 큰 시련이었지만, 지내고 보니 청소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축복과 은총의 시간이었다. “뭐, 너희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웃기고 있네.” 아이들은 성인들에게 자라며 숱하게 당한 상처의 분노를 나에게 원 없이 쏟아 붓고 있었다.
이렇게 지내는 나에게 의례적으로 들려주는 인사말이 있었다. “아이들 잘 있소? 아이들 좀 변했소?” 그 인사말의 뜻은 ‘그놈들은 변하지 않아. 헛고생이야.’ 라는 모범이 지닌 고정의 시각이 던져 준 나를 향한 빈정댐이었다. 성인(成人)들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자녀와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며 간섭하고 비난할 줄만 안다. 그들은 나이만 들었을 뿐, 문제의 문제해결 방법을 전혀 모르는 미성숙한 철부지들인 것이다. 결국 문제 성인들이 자라나는 학생을 문제아로 몰고는 언어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으로 강제하며, 칭찬 한마디에 인색하고 분노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문제아들 잘 있느냐? 좀 변했냐?” 는 의례적으로 던진 인사말이 나는 솔직히 싫었다. 나는 상처입고 분노를 지닌 청소년들의 대변자가 되어 그들을 향해 외쳤다. “변할 놈은 솔직히 네 놈이다. 잘 있어야 할 놈도 네 놈이고. 네가 문제아고 네가 변해야 되는 거야, 알겠냐!” 라고 응수해 주었다.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재의 학생들은 理性이 번득이기에 늘 칭찬도 독차지 한다. 이에 수재들은 우쭐대고 때론 감사할 줄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라나 모범이 된다. 사회성도 없으면서 말이다. 반면 비록 논리적이고 수학적이지 못하지만, 인간성이 살아있고 역마살이 낀 듯 세상의 맛을 향해 숱한 경험을 쌓아가는 말썽꾸러기들은 늘 모범으로부터 칭찬 대신 빈정댐, 설교식 훈화의 잔소리를 수없이 들으며 성장해 간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교육의 현장에서 모범으로 공부만 하다 출세했다. 그래서 모범인 선생님은 문제 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어 지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모범의 선생님은 문제아들을 만나면 그들의 문제해법 대신 상처를 안기는 문책성 강제를 하곤 한다. 따지고 보면 정작 변해야할 사람은 ‘문제 부모’이고 ‘문제 교사’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취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야 할 텐데 화부터 낸다. 이것이 성인들이다. 문제아들이 왜 반항하는가? 사사건건 일방적으로 간섭하니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기를 꺾냐는 의미의 반항인 것이다.
놀기만을 좋아하는 한 폭주족이 있었다. 폭주족을 맡은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왜 말썽피우냐? 네 문제로 왜 내가 고통을 당해야 하니? 학교 그만둬라!” 하는 수 없이 부적응, 문제아가 되어 학교를 퇴출당했다. 그 학생은 우리학교에 왔고, 나는 그에게 끊임없이 자유를 선물하고 그는 여전히 방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자발성을 지니고 자신을 조율해갔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수학 천재였다. 우리 선생님이 “너 수학문제 잘 푼다.”라고 하자, 결손난 중학수학을 몇 개월 만에 다 풀어버리는 실력을 발휘했다. 산책길에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자네를 철들게 할 때가 언제였지?” “제 안에도 솔직히 남보다 똑똑해지고 싶은, 공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을 포함해서 제가 만난 대부분의 성인들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끊임없이 간섭하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는 자유가 방종이 될 때라도 기다려 줄 줄 아는 선생님들이 계셔 행복했습니다.” 그는 분노가 삭혀지고 수업시간이 무척 재미가 났다고 했다. 미적분도 풀게 된 학생이다. “왜 수학이 그토록 재미있니,” “문제의 답이 명쾌하잖아요.”, “국어는 어떠니?”, “국어는 싫습니다.” “왜?” “답이 여러 개 같아 싫어요.” 그 학생은 하늘을 훨훨 나는 파일럿이 목표라며 끊임없이 도전하며 공부를 한다.
문제아는 문제만 풀어주면 된다. 부적응한 학생들은 적응토록 도와주면 된다. 왜 성인들은 그 방법을 모르는가. 학생들이 인성이 회복되면 때가 늦지만 즉시 지식교과에 관심을 갖는다. 자기조율의 에너지인 자발성 때문이다. 성인들이여! 부디 어른이 되어 학생들이 자발성을 갖도록 지도하라!
모범의 잣대로 보면 공부 잘하고 어른들 말 잘 듣고 아무 탈 없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아니면 모두가 문제이다. 학교를 세우고 경제가 바닥을 치듯 삶의 바닥을 치는 학생들을 거듭 만났다. 모범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속이 뒤집히는 모습을 하는 학생들과 지냈다. 나는 이들을 만나기 전에는 건강한 남녀노소들과 지냈을 뿐, 이런 학생들은 만나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이런 나에게 삶의 바닥을 치는 학생들과의 만남은, 지금 돌이켜보면 우연히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에 이런 뜻을 담아주신 덕분이다.
바닥을 치는 학생들의 삶 중에 性의 에너지는 대단했다. 하느님은 이런 학생들에게 큰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거룩함(聖)’을 넣어 그들을 아름답게 바꿔보라는 분부를 내게 내리셨다. 그들 청소년들의 만남은 내가 겪은 고통 중에 가장 큰 시련이었지만, 지내고 보니 청소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축복과 은총의 시간이었다. “뭐, 너희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웃기고 있네.” 아이들은 성인들에게 자라며 숱하게 당한 상처의 분노를 나에게 원 없이 쏟아 붓고 있었다.
이렇게 지내는 나에게 의례적으로 들려주는 인사말이 있었다. “아이들 잘 있소? 아이들 좀 변했소?” 그 인사말의 뜻은 ‘그놈들은 변하지 않아. 헛고생이야.’ 라는 모범이 지닌 고정의 시각이 던져 준 나를 향한 빈정댐이었다. 성인(成人)들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자기들 방식대로 자녀와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며 간섭하고 비난할 줄만 안다. 그들은 나이만 들었을 뿐, 문제의 문제해결 방법을 전혀 모르는 미성숙한 철부지들인 것이다. 결국 문제 성인들이 자라나는 학생을 문제아로 몰고는 언어적 폭력과 물리적 폭력으로 강제하며, 칭찬 한마디에 인색하고 분노를 심어주었던 것이다. “문제아들 잘 있느냐? 좀 변했냐?” 는 의례적으로 던진 인사말이 나는 솔직히 싫었다. 나는 상처입고 분노를 지닌 청소년들의 대변자가 되어 그들을 향해 외쳤다. “변할 놈은 솔직히 네 놈이다. 잘 있어야 할 놈도 네 놈이고. 네가 문제아고 네가 변해야 되는 거야, 알겠냐!” 라고 응수해 주었다.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수재의 학생들은 理性이 번득이기에 늘 칭찬도 독차지 한다. 이에 수재들은 우쭐대고 때론 감사할 줄도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자라나 모범이 된다. 사회성도 없으면서 말이다. 반면 비록 논리적이고 수학적이지 못하지만, 인간성이 살아있고 역마살이 낀 듯 세상의 맛을 향해 숱한 경험을 쌓아가는 말썽꾸러기들은 늘 모범으로부터 칭찬 대신 빈정댐, 설교식 훈화의 잔소리를 수없이 들으며 성장해 간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교육의 현장에서 모범으로 공부만 하다 출세했다. 그래서 모범인 선생님은 문제 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어 지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모범의 선생님은 문제아들을 만나면 그들의 문제해법 대신 상처를 안기는 문책성 강제를 하곤 한다. 따지고 보면 정작 변해야할 사람은 ‘문제 부모’이고 ‘문제 교사’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취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야 할 텐데 화부터 낸다. 이것이 성인들이다. 문제아들이 왜 반항하는가? 사사건건 일방적으로 간섭하니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기를 꺾냐는 의미의 반항인 것이다.
놀기만을 좋아하는 한 폭주족이 있었다. 폭주족을 맡은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왜 말썽피우냐? 네 문제로 왜 내가 고통을 당해야 하니? 학교 그만둬라!” 하는 수 없이 부적응, 문제아가 되어 학교를 퇴출당했다. 그 학생은 우리학교에 왔고, 나는 그에게 끊임없이 자유를 선물하고 그는 여전히 방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았다. 그 후 그는 자발성을 지니고 자신을 조율해갔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수학 천재였다. 우리 선생님이 “너 수학문제 잘 푼다.”라고 하자, 결손난 중학수학을 몇 개월 만에 다 풀어버리는 실력을 발휘했다. 산책길에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자네를 철들게 할 때가 언제였지?” “제 안에도 솔직히 남보다 똑똑해지고 싶은, 공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을 포함해서 제가 만난 대부분의 성인들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끊임없이 간섭하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이 학교는 자유가 방종이 될 때라도 기다려 줄 줄 아는 선생님들이 계셔 행복했습니다.” 그는 분노가 삭혀지고 수업시간이 무척 재미가 났다고 했다. 미적분도 풀게 된 학생이다. “왜 수학이 그토록 재미있니,” “문제의 답이 명쾌하잖아요.”, “국어는 어떠니?”, “국어는 싫습니다.” “왜?” “답이 여러 개 같아 싫어요.” 그 학생은 하늘을 훨훨 나는 파일럿이 목표라며 끊임없이 도전하며 공부를 한다.
문제아는 문제만 풀어주면 된다. 부적응한 학생들은 적응토록 도와주면 된다. 왜 성인들은 그 방법을 모르는가. 학생들이 인성이 회복되면 때가 늦지만 즉시 지식교과에 관심을 갖는다. 자기조율의 에너지인 자발성 때문이다. 성인들이여! 부디 어른이 되어 학생들이 자발성을 갖도록 지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