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107 | 작성일 : 2009년 11월 10일

                                모성애

 병아리가 몇 개월 지나자 제법 어른스런 닭이 되어 돌아다닌다. 그 병아리를 몰고 다니던  그 화려한 어미닭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그 당시 동료 암탉 한 마리가 있었는데 먹이만 축내는 한직처럼 불쌍해 보였다. 산란도 없어 미움을 받고 있음을 알아버렸는지 동료 암탉은 어느 날인가부터 모습을 감춰버렸다. 오래도록 보이지 않아 아마도 죽었겠지 생각 했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눈을 의심했다. “나도 한 건 했소.” 하며 으스대기라도 하듯 아홉 마리의 병아리를 몰고 당당히 나타났다. 얼마나 그 암탉이 대견스럽던지 21일간의 산고를 끝내고 병아리를 몰고 세상 밖에 나타내 보였다. 나는 수고를 보상하듯 모이를 한 움큼 내다 주었다. 배가 고픈 것일까. 암탉은 사정없이 모이를 주워 먹는 데 병아리들은 먹이를 먹을 시기가 되질 않았는지 어미닭 주변에서 서성일 뿐이었다. 암탉은 날개 아래 병아리를 모으고는 추위를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잠시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로 식당에 갔고 시간이 제법 흐른 후에야 집으로 돌아와서는 닭을 살폈다. 그런데 분명 아홉 마리였었는데 닭 주변에는 네 마리의 병아리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뿔싸,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맨홀 덮개가 듬성듬성 틈 사이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맨홀 깊은 바닥으로 병아리들이 곤두박질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즉시 맨홀 뚜껑을 열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니, 한 마리는 온 몸에 물이 묻은 채로 축 늘어져 중상인 듯 죽음을 재촉하고 있었고 또 한 마리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또 다른 세 마리는 하수구 관을 따라 깊숙이 빛을 따라 이동 중이었다. 다행이 세 마리는 깊은 맨홀 밑으로 떨어졌지만 건강해 보였다.
 나는 맨홀 밖으로 나와 집으로 달려 헤어드라이기로 병아리 몸에 물기를 말려주고 생기를 되찾게 해주었다. 나로서는 다 죽어가는 병아리에게 이것이 최선이었다. 관리자로서 내 책임을 다한 것이다. 죽음에서 건져낸 다섯 마리 병아리를 어미닭에 다시 넘겨주기로 했다. 병아리를 들고 나타나자 어미닭은 놀란 듯 “까악” 소리를 내며 날개를 들추고 공격 자세를 취하면서 “왜 네가 내 새끼를 들고 있느냐? 빨리 내놓지 않고.” 하는 투로 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건강한 세 마리는 즉시 어미닭 품으로 옮겨갔지만 다 죽어가는 병아리 두 마리는 조심스레 손으로 어미닭 품에 밀어 넣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그 병아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다시 암탉을 찾아 나섰다. 내가 처음 암탉이 병아리 아홉을 선보였던 그 모습으로 어미닭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물에 빠져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숨을 몰아쉬던 병아리도, 다리를 절던 병아리도 어미 품에서 안정을 되찾고 치유를 받았는지 처음이 모습처럼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순간 나는 그 병아리들이 어미닭이 없었다면 회생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까악”소리는 내던 공격적인 어미닭, 다 죽어가는 병아리를 품어 안고 그 품에서 위로를 받고 되살아난 병아리를 보며 동물의 모성애를 생각해 본다.
 어머니의 모성애도 동물적 본능인가? 내 자식이 위험에 직면할 때 보호막이 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강성 엄마들을 본다. 하나의 생명이 건강하게 커가는 것도 치유되는 것도 엄마 품이 최고이다. 그 엄마가 없어보라. 그 생명은 일찍이 죽거나, 살아있다면 매우 모진 생을 살아가야 한다. 강성 독수리 엄마들을 본다. 내 자식이 위험을 당할 때 사력을 다해 구출해 낸다. 그런 엄마가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 모두는 건강한 생명이 되어 오늘도 훌륭하게 살아간다. 대견스러운 든든한 어미닭, 그 품에서 자라나는 건강한 병아리들은 성장하며 어미를 닮아 자기 생명을 키워간다. 지난 번 일곱 마리의 병아리를 이끌던 어미닭은 건강한 닭을 만들고는 사라졌다. 이 어미 닭도 아홉 마리를 이끌고 살다가 닭이 될 즈음하여 퇴장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을 이루는 서클이며 그래서 오늘도 창조는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종의 신세로 하느님의 품속에서 잇기를 바란다면 인간도 그렇게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커가고 성숙함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