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정치에 개입하는가?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855 | 작성일 : 2009년 8월 9일
교회는 왜 정치에 개입하는가?
“신부님!, 왜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는 겁니까? 왜 신부님들은 성당에서 기도나 하고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 있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가 거리미사를 합니까? 도대체 왜 성스러운 분들이 그 시끄러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입니까?
얼마 전, 진보 시민단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비를 청주의 상당공원에 세우려다가 보수단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심지 못하고 임시로 성당에 세웠다고 들었다. 그 일을 놓고 성당신자들 사이에 설왕설래 애기도 많다고 들었다. 신부님이 신자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추모비를 성당으로 가져왔다며 보수성향의 신자분들이 분개하고 신부님 의 행위가 못마땅해서 타 성당으로 나간다는 후문도 들린다. 물론 그런 말이 왜 없겠는가. ‘거리의 사제들인 정의구현 사제단’하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일으키는 일부 신자들의 볼멘소리도 담겨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신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안주하는 신자들이 아님을 분명히 삶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매일 기도를 드리는 것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내 일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행해지는 것만이 아니다. 손을 합장하여 저 높이 계신 신에게 손이 닳도록 비는 유신론자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기도와 미사의 반복된 성스런 행위는, 예수님의 삶을 익히는 훈련이며 이를 습관화하는 노력이다. 이로써 하늘나라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추상적인 단어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면 구체적인 볼 수 있는 교회가 된다. 교회의 존립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고, 그를 위해 교회 구성원은 세속에 타협하지 않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역할과 책무성을 지니게 된다.
“신부님!, 제발 좀 정치판에 나서질 말아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당신이 용산참사의 구체적 피해자이며, 쌍용 자동차의 노동자라 생각해 보라. 아무도 당신의 고통에 관심도 없고, 자신이 처참하게 세상에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누구를 찾아가겠는가?” 당신이 이 물음에 대답을 먼저 나에게 해주면, 나도 당신의 질문에 답하겠다고 하자, 상대방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2003년 9.11테러로 미국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지만 내 피붙이가 죽은 것만큼이 그 고통과 비교해서 고작 쥐꼬리만큼의 애도뿐이었다. 아무리 큰 고통도 남의 일일 때는 나에게 다 그렇게 별 것 아니다. 그러나 내 문제가 되어보라. 그러면 그 신자의 태도는 돌변한다. 신부님에게 찾아와서 외칠 것이다. “신부님! 왜 성당에서 기도와 미사만 하고 계시는 겁니까? 현장엘 가보세요. 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제 고통을 보고만 계십니까?” 라고 절규하듯 외칠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근로자의 아내들이 추기경을 예고 없이 내방했다고 들었다. 추기경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고, 그들의 애절함을 다 들으시고 함께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아마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추기경께서는 “공권력 투입은 참극을 불러올 것”라고 경고하셨다. 다행히도 죽음으로 치닫는 문제가 소생하고 노사가 극적타결을 이루어 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는 용산참사의 참극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노사양측과 국민이 여망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권력은 군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교권(敎勸)이 있으며 그 교권으로 신자들을 양육한다. 정부는 정권(政權)을 지니고 국민들을 행복하도록 돌본다. 교권과 정권은 각기 고유하며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권은 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재촉하며, 정권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남용되면 올바로 사용되어지도록 그와 맞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역할과 책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권의 정치개입은 정권이 올바로 서도록 하자는 숭고한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미사성제를 통하여 사랑을 배워 실천하도록 날마다 신자들을 가르친다. 아직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빌고 얻고 행복하길 바라고 있는 유신론을 신봉하는 기복 종교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신자들이 마음은 권모술수가 능한 정치판에 끼어들면 무슨 해가 사제들에게 돌아올까 걱정이 되어 사랑과 관심임을 알고 있다. 온 몸으로 투신하는 거리의 사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바꾸는 성사(聖事)를 행하는 분들이다. 약자들을 돕고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을 위해 성스러움의 더 큰 일을 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적대관계가 아니며 공종의 관계이며, 복고가 더 큰 문제라 여겨진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안주하고 편안해지려는 복고적 태도가 더 심각한 병임을 말해두고 싶다.
“신부님!, 왜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는 겁니까? 왜 신부님들은 성당에서 기도나 하고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 있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가 거리미사를 합니까? 도대체 왜 성스러운 분들이 그 시끄러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입니까?
얼마 전, 진보 시민단체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비를 청주의 상당공원에 세우려다가 보수단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심지 못하고 임시로 성당에 세웠다고 들었다. 그 일을 놓고 성당신자들 사이에 설왕설래 애기도 많다고 들었다. 신부님이 신자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추모비를 성당으로 가져왔다며 보수성향의 신자분들이 분개하고 신부님 의 행위가 못마땅해서 타 성당으로 나간다는 후문도 들린다. 물론 그런 말이 왜 없겠는가. ‘거리의 사제들인 정의구현 사제단’하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일으키는 일부 신자들의 볼멘소리도 담겨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유신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안주하는 신자들이 아님을 분명히 삶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매일 기도를 드리는 것도,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내 일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행해지는 것만이 아니다. 손을 합장하여 저 높이 계신 신에게 손이 닳도록 비는 유신론자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기도와 미사의 반복된 성스런 행위는, 예수님의 삶을 익히는 훈련이며 이를 습관화하는 노력이다. 이로써 하늘나라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문화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추상적인 단어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면 구체적인 볼 수 있는 교회가 된다. 교회의 존립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고, 그를 위해 교회 구성원은 세속에 타협하지 않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역할과 책무성을 지니게 된다.
“신부님!, 제발 좀 정치판에 나서질 말아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당신이 용산참사의 구체적 피해자이며, 쌍용 자동차의 노동자라 생각해 보라. 아무도 당신의 고통에 관심도 없고, 자신이 처참하게 세상에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누구를 찾아가겠는가?” 당신이 이 물음에 대답을 먼저 나에게 해주면, 나도 당신의 질문에 답하겠다고 하자, 상대방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2003년 9.11테러로 미국에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지만 내 피붙이가 죽은 것만큼이 그 고통과 비교해서 고작 쥐꼬리만큼의 애도뿐이었다. 아무리 큰 고통도 남의 일일 때는 나에게 다 그렇게 별 것 아니다. 그러나 내 문제가 되어보라. 그러면 그 신자의 태도는 돌변한다. 신부님에게 찾아와서 외칠 것이다. “신부님! 왜 성당에서 기도와 미사만 하고 계시는 겁니까? 현장엘 가보세요. 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제 고통을 보고만 계십니까?” 라고 절규하듯 외칠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근로자의 아내들이 추기경을 예고 없이 내방했다고 들었다. 추기경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그들을 따듯하게 맞이해 주었고, 그들의 애절함을 다 들으시고 함께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아마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추기경께서는 “공권력 투입은 참극을 불러올 것”라고 경고하셨다. 다행히도 죽음으로 치닫는 문제가 소생하고 노사가 극적타결을 이루어 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는 용산참사의 참극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노사양측과 국민이 여망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권력은 군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교권(敎勸)이 있으며 그 교권으로 신자들을 양육한다. 정부는 정권(政權)을 지니고 국민들을 행복하도록 돌본다. 교권과 정권은 각기 고유하며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권은 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재촉하며, 정권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남용되면 올바로 사용되어지도록 그와 맞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역할과 책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권의 정치개입은 정권이 올바로 서도록 하자는 숭고한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교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미사성제를 통하여 사랑을 배워 실천하도록 날마다 신자들을 가르친다. 아직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빌고 얻고 행복하길 바라고 있는 유신론을 신봉하는 기복 종교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신자들이 마음은 권모술수가 능한 정치판에 끼어들면 무슨 해가 사제들에게 돌아올까 걱정이 되어 사랑과 관심임을 알고 있다. 온 몸으로 투신하는 거리의 사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바꾸는 성사(聖事)를 행하는 분들이다. 약자들을 돕고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을 위해 성스러움의 더 큰 일을 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적대관계가 아니며 공종의 관계이며, 복고가 더 큰 문제라 여겨진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안주하고 편안해지려는 복고적 태도가 더 심각한 병임을 말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