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부활을 꿈꾸며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918 | 작성일 : 2010년 3월 31일
교육의 부활을 꿈꾸며
얼마 전 ‘미 시사주간 타임 최신호’가 ‘10년 후 미래 교육의 트렌드 10선(選)을 소개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학교중퇴자 경제(dropout economy) 시대’가 온다는 대목이었다. 그전까지 중산층 부모가 자식에게 건네는 말은 한결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마치고 취직해라.” 하지만 시대는 바뀌고 있다. 미국 내 고교 중퇴자는 날로 늘어 2006년 기준 10명 중 3명꼴이고, 청소년의 3분의 1가량은 대학에 안 간다. 제도권 교육이 불신을 받으면서 새로운 학습과 삶의 방식에 대한 실험은 더욱 늘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시골학교로 유학가기, 홈스쿨링 등 대안학교가 더욱 활기를 띨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나라에 대안교육이 실시된 지도 13년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제도권 교육방식이 아닌 새로운 학습과 삶의 방식으로 다수의 실험학교를 태동시키고 있다. 대안학교는 ‘중퇴자들의 학교’라는 곱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인기는 고공행진이다. 얼마 전에 한 담임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원서를 쓰려는 한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그 학교 보내면 자식 망칩니다.”라며 만류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그 학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해 온다. 격세지감이다. 학교는 브랜드화 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찾는다. 과연 무엇이 ‘문제아 학교’를 극복하고 교육의 부활을 이룩했는가?
일반적으로 기존학교의 교육방향은 전근대적인 교육인 교실중심수업과 소수의 엘리트교육이다. 이런 교육정책만이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논리이다. 이는 사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미성숙한 중퇴자들은 그 학교에 있는 동안 사랑받기를 더 원했지만,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경쟁이 싫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적어도 교육을 논하는 사람이라면 교육의 본질 정도를 모를 리 없다. 안다면 교육이 정도를 가야 할 것이다. 교육현장에 소수의 기득권자들 때문에 교육의 본질은 왜곡되었고, 다수가 고통에 직면하게 내버려 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럴 때 교육부활을 위한 희생(犧牲) 제사가 필요하다. 그 희생 중 하나는, 학교 중퇴자들을 위해 헌신한 대안학교의 교육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심각한 고통에 직면했지만, 그 고통의 역사의 흐름은 그들을 향한 교육의 부활로 이루어 냈다. 많은 이들이 교육의 부활을 바라고 있었지만 부활이 요원한 이유는, 교사들의 진정한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연 교육현장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는가? 소수의 엘리트들만 세상에 등장하고 공부가 어려운 다수의 학생들이 세상 속으로 숨어버린다면, 교육가족 전체는 ‘행복’이란 단어를 꺼낼 수가 없다. 한때 우리는 또 다른 학교중퇴자를 내서 학교가 뒤숭숭했다. 학교 정원에 빈자리가 여기저기 생겨나고, 학교가 행복하지 않다며 전학 가려는 학생들로 분위기가 싸늘했다. 그런 상황의 학교 경영자가 되어보라. 몸이 애달다. 그럴 때 경영자나 구성원들인 교육의 주체가 함께 교육이 학생들의 욕구에 충족되지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이유야 어떠하든 중도탈락의문제를 단순히 학생들의 문제라고 취급하지 않았다.
교사의 교직관 중 ‘노동자관’의 입장보다는 ‘생명 관리자’로서의 학생 사랑과 지속적인 성실함으로 그들을 돌보며 바라보았다. 학생들의 문제점을 사랑으로 그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을 했다. 왜 그들이 학교를 빈자리로 만들고 학교를 떠난 것인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노력 덕분에 지금은 우리학교의 정원은 한 자리도 공석이 없다. 이제 중퇴자가 한명도 없다는 말이다.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떠올리지 않으면 진정한 부활이 없다. 미성숙한 인간을 어린 시절부터 성인으로 이루어갈 때까지의 전 과정을 교육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을 만드는 교육과정 속에 사랑과 성실함이 빠진 소수의 엘리트교육으로 위안을 삼는다면, 이는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일 것이다. 교육의 부활은 엘리트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교육의 모든 대상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교육의 본질을 접근하려는 끊임없는 희생으로 꽃피워진 작업이 교육이라 여겨진다.
교회는 기쁨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고 있다. 부활은 깊은 성찰을 통한 진리를 만남으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피어나는 축제이며, 이는 사랑과 희생의 결과인 것이다. 미국 사회가 내놓은 미래의 교육 트렌드가 우리 교육에서도 예견된다면, 학교를 떠난 중퇴자들이 왜 늘어나고 있는지를 재차 따져보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희생이 따르는 교육이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교육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날이 오기를 꿈꾸는 바이다
얼마 전 ‘미 시사주간 타임 최신호’가 ‘10년 후 미래 교육의 트렌드 10선(選)을 소개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학교중퇴자 경제(dropout economy) 시대’가 온다는 대목이었다. 그전까지 중산층 부모가 자식에게 건네는 말은 한결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 마치고 취직해라.” 하지만 시대는 바뀌고 있다. 미국 내 고교 중퇴자는 날로 늘어 2006년 기준 10명 중 3명꼴이고, 청소년의 3분의 1가량은 대학에 안 간다. 제도권 교육이 불신을 받으면서 새로운 학습과 삶의 방식에 대한 실험은 더욱 늘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시골학교로 유학가기, 홈스쿨링 등 대안학교가 더욱 활기를 띨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나라에 대안교육이 실시된 지도 13년째를 맞이하고 있으며, 제도권 교육방식이 아닌 새로운 학습과 삶의 방식으로 다수의 실험학교를 태동시키고 있다. 대안학교는 ‘중퇴자들의 학교’라는 곱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인기는 고공행진이다. 얼마 전에 한 담임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원서를 쓰려는 한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그 학교 보내면 자식 망칩니다.”라며 만류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그 학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해 온다. 격세지감이다. 학교는 브랜드화 되었고 많은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찾는다. 과연 무엇이 ‘문제아 학교’를 극복하고 교육의 부활을 이룩했는가?
일반적으로 기존학교의 교육방향은 전근대적인 교육인 교실중심수업과 소수의 엘리트교육이다. 이런 교육정책만이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라는 논리이다. 이는 사실 소수의 기득권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미성숙한 중퇴자들은 그 학교에 있는 동안 사랑받기를 더 원했지만,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경쟁이 싫어 학교를 떠나야 했다. 적어도 교육을 논하는 사람이라면 교육의 본질 정도를 모를 리 없다. 안다면 교육이 정도를 가야 할 것이다. 교육현장에 소수의 기득권자들 때문에 교육의 본질은 왜곡되었고, 다수가 고통에 직면하게 내버려 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럴 때 교육부활을 위한 희생(犧牲) 제사가 필요하다. 그 희생 중 하나는, 학교 중퇴자들을 위해 헌신한 대안학교의 교육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심각한 고통에 직면했지만, 그 고통의 역사의 흐름은 그들을 향한 교육의 부활로 이루어 냈다. 많은 이들이 교육의 부활을 바라고 있었지만 부활이 요원한 이유는, 교사들의 진정한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연 교육현장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는가? 소수의 엘리트들만 세상에 등장하고 공부가 어려운 다수의 학생들이 세상 속으로 숨어버린다면, 교육가족 전체는 ‘행복’이란 단어를 꺼낼 수가 없다. 한때 우리는 또 다른 학교중퇴자를 내서 학교가 뒤숭숭했다. 학교 정원에 빈자리가 여기저기 생겨나고, 학교가 행복하지 않다며 전학 가려는 학생들로 분위기가 싸늘했다. 그런 상황의 학교 경영자가 되어보라. 몸이 애달다. 그럴 때 경영자나 구성원들인 교육의 주체가 함께 교육이 학생들의 욕구에 충족되지 못했다는 반성을 했다. 이유야 어떠하든 중도탈락의문제를 단순히 학생들의 문제라고 취급하지 않았다.
교사의 교직관 중 ‘노동자관’의 입장보다는 ‘생명 관리자’로서의 학생 사랑과 지속적인 성실함으로 그들을 돌보며 바라보았다. 학생들의 문제점을 사랑으로 그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을 했다. 왜 그들이 학교를 빈자리로 만들고 학교를 떠난 것인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노력 덕분에 지금은 우리학교의 정원은 한 자리도 공석이 없다. 이제 중퇴자가 한명도 없다는 말이다.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떠올리지 않으면 진정한 부활이 없다. 미성숙한 인간을 어린 시절부터 성인으로 이루어갈 때까지의 전 과정을 교육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을 만드는 교육과정 속에 사랑과 성실함이 빠진 소수의 엘리트교육으로 위안을 삼는다면, 이는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일 것이다. 교육의 부활은 엘리트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교육의 모든 대상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사랑으로 교육의 본질을 접근하려는 끊임없는 희생으로 꽃피워진 작업이 교육이라 여겨진다.
교회는 기쁨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고 있다. 부활은 깊은 성찰을 통한 진리를 만남으로써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피어나는 축제이며, 이는 사랑과 희생의 결과인 것이다. 미국 사회가 내놓은 미래의 교육 트렌드가 우리 교육에서도 예견된다면, 학교를 떠난 중퇴자들이 왜 늘어나고 있는지를 재차 따져보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과 희생이 따르는 교육이 있을 때 그때야 비로소 교육의 부활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날이 오기를 꿈꾸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