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지기 농사꾼이어야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473 | 작성일 : 2010년 7월 4일
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지기 농사꾼이어야
교직관은 전통적으로 성직관, 전문직관 그리고 노동직관을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내가 교감자격연수 대상자로 소양면접을 했을 때도 교육청 관계자는 바람직한 교직관에 대하여 질문했고, 나는 그 당시 교사로서 경력이 제법 있을 때인데도 살아 숨 쉬는 생생한 교직관을 말하지 못했다. 이론적으로야 교직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교직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교장이자 대학에서 교직실무를 강의하는 교육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제법 연륜이 쌓인 선생님이 되어 예비교사인 사범대학 학생들을 지켜볼 기회가 많아졌다. 교사들은 다양한 삶을 살아야 이론적 지식체계를 현장에 구체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데, 교실과 도서관에서 교직을 준비한 교사들인지라 정작 살아 숨 쉬는 교직관을 지닐 리가 없다. 예전에 교사 임용면접이 있던 날, 나는 그들 면접관이 되어 그들에게 교직관을 묻고 있자니 어설픈 옛 기억이 떠올라 그들을 십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오늘날 교사의 직업은 최고의 선망 자리가 되었다. 그러기에 치열한 경쟁에서 선발이 되어야 한다. 이제 암기력이 뛰어난 1등급 선수들이 임용의 자리를 다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정작 교사가 꿈이고 희망인 대상들은 어쩌면 교육현장에 서질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학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교육자가 부족해 교육현장은 더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거쳐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교사가 때로는 힘든 학생들을 만날 때면 실망하고 교직이 행복하지 않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런 불평을 하는 교사라면 불행해지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한다. 교사는 아동과 청소년들을 위한 소명과 밝은 마음을 가지고 무엇보다 교사 자신의 삶이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학생을 대하기가 너무나 벅찬 나머지 힘들다는 말만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교사는 내가 진로를 잘못 택했다고 실망하는 눈치도 역력하다.
그렇다면 교직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는 ‘교사의 교직관은 성직이다.’ 그들이 성직자가 아니면서 성직이란 이유는 생명관리자로서 생명 구원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희생과 봉사, 사랑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천직으로 여기며 학생을 만나는 일에는 항상 웃음을 간직해야 한다.
둘째는 교사의 교직관은 ‘전문직관’이다. 교사들은 자기 전공교과를 가르치는 것만이 전문직이라 여기는 듯하다. 교과지도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전문직관은 생활지도이다. 교사는 학생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 생명이 문제가 생기고 부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문제와 부적응을 풀어줄 교사의 전문적 지도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교사의 전문직관은 절름발이이다. 학원 교사들은 지식전달자로 일하지만 학교의 교사들은 생명관리자로 일한다는 것이 그들과 다르다. 소위 임용고시를 통과한 수재교사들은 중하위 그룹과 친구로 지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외된 그룹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행동들을 하고 지냈는지 전혀 모른 채 제 세상을 산 사람들이다. 이들 엘리트들이 교사가 되어 챙겨주는 대상이 오직 공부 잘하는 대상이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거부한다면 그들은 문제와 부적응의 학생을 지도할 자격이 부족하다. 존중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의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불신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생활지도는 이론이 아니며 실제상황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임상지도에서 ‘이것은 해, 저것은 하지 마’, 따위의 지시나 명령들이 전부일 뿐이다. 라포(rapport)가 전혀 생성되지 않고 모래알처럼 겉돈다.
셋째는 교사의 교직관으로 ‘노동직관’이다. 교사는 공산품의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교사는 하루 종일 공장에서 단순작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각종 소음에서 견디어 내는 공장노동자들과 다르다는 말이다. 공장근로자들은 근로기준법에 의거, 정확하게 근로 기준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데 나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는 노동자들이 갖는 상식적인 노동직관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일차 산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은 결코 노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논밭의 작물들과 동물들의 생명을 관리하는 생명관리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삶의 터전인 논밭에서, 농장에서 생명관리자로의 훌륭한 소출을 위해 투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만일 농민들이 공장근로자들처럼 근로기준을 적용하여 근로시간 8시간을 고집한다면 생명은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좋은 먹거리도 공급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교직관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교직관은 어떤 것일까. 나는 ‘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지기 농사꾼이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싶다. 교사는 사춘기, 질풍노도의 미성숙한 학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부적응을 적응으로 만들어 줄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을 위해 밤낮없이 투신해야 한다. 전공교과의 충실한 교과지도는 선수가 됨은 물론, 학생지도에 있어서 시간에 관계없이 생명을 보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 맞추어 ‘땡’ 하면 출근하고 ‘땡’ 하면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가 자기 권리만 챙기고 수당만 챙기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진정한 교사의 역할을 하는 권한을 소홀이 한다면, 학생들의 생명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단위학교의 성패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진정한 교직관에서 차별화 된다. 이 어찌 교직관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교직관은 전통적으로 성직관, 전문직관 그리고 노동직관을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내가 교감자격연수 대상자로 소양면접을 했을 때도 교육청 관계자는 바람직한 교직관에 대하여 질문했고, 나는 그 당시 교사로서 경력이 제법 있을 때인데도 살아 숨 쉬는 생생한 교직관을 말하지 못했다. 이론적으로야 교직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교직관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교장이자 대학에서 교직실무를 강의하는 교육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제법 연륜이 쌓인 선생님이 되어 예비교사인 사범대학 학생들을 지켜볼 기회가 많아졌다. 교사들은 다양한 삶을 살아야 이론적 지식체계를 현장에 구체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데, 교실과 도서관에서 교직을 준비한 교사들인지라 정작 살아 숨 쉬는 교직관을 지닐 리가 없다. 예전에 교사 임용면접이 있던 날, 나는 그들 면접관이 되어 그들에게 교직관을 묻고 있자니 어설픈 옛 기억이 떠올라 그들을 십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오늘날 교사의 직업은 최고의 선망 자리가 되었다. 그러기에 치열한 경쟁에서 선발이 되어야 한다. 이제 암기력이 뛰어난 1등급 선수들이 임용의 자리를 다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정작 교사가 꿈이고 희망인 대상들은 어쩌면 교육현장에 서질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학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교육자가 부족해 교육현장은 더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거쳐 엘리트라고 자처하는 교사가 때로는 힘든 학생들을 만날 때면 실망하고 교직이 행복하지 않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런 불평을 하는 교사라면 불행해지기 전에 그만 두어야 한다. 교사는 아동과 청소년들을 위한 소명과 밝은 마음을 가지고 무엇보다 교사 자신의 삶이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즐거워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학생을 대하기가 너무나 벅찬 나머지 힘들다는 말만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어떤 교사는 내가 진로를 잘못 택했다고 실망하는 눈치도 역력하다.
그렇다면 교직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는 ‘교사의 교직관은 성직이다.’ 그들이 성직자가 아니면서 성직이란 이유는 생명관리자로서 생명 구원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희생과 봉사, 사랑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천직으로 여기며 학생을 만나는 일에는 항상 웃음을 간직해야 한다.
둘째는 교사의 교직관은 ‘전문직관’이다. 교사들은 자기 전공교과를 가르치는 것만이 전문직이라 여기는 듯하다. 교과지도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지만 더 중요한 전문직관은 생활지도이다. 교사는 학생의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 생명이 문제가 생기고 부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문제와 부적응을 풀어줄 교사의 전문적 지도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교사의 전문직관은 절름발이이다. 학원 교사들은 지식전달자로 일하지만 학교의 교사들은 생명관리자로 일한다는 것이 그들과 다르다. 소위 임용고시를 통과한 수재교사들은 중하위 그룹과 친구로 지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외된 그룹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행동들을 하고 지냈는지 전혀 모른 채 제 세상을 산 사람들이다. 이들 엘리트들이 교사가 되어 챙겨주는 대상이 오직 공부 잘하는 대상이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거부한다면 그들은 문제와 부적응의 학생을 지도할 자격이 부족하다. 존중받지 못하는 소외계층의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불신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생활지도는 이론이 아니며 실제상황이다. 겨우 한다는 것이 임상지도에서 ‘이것은 해, 저것은 하지 마’, 따위의 지시나 명령들이 전부일 뿐이다. 라포(rapport)가 전혀 생성되지 않고 모래알처럼 겉돈다.
셋째는 교사의 교직관으로 ‘노동직관’이다. 교사는 공산품의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노동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교사는 하루 종일 공장에서 단순작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각종 소음에서 견디어 내는 공장노동자들과 다르다는 말이다. 공장근로자들은 근로기준법에 의거, 정확하게 근로 기준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데 나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교사는 노동자들이 갖는 상식적인 노동직관을 뛰어넘는 사람이다. 일차 산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은 결코 노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논밭의 작물들과 동물들의 생명을 관리하는 생명관리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삶의 터전인 논밭에서, 농장에서 생명관리자로의 훌륭한 소출을 위해 투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만일 농민들이 공장근로자들처럼 근로기준을 적용하여 근로시간 8시간을 고집한다면 생명은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좋은 먹거리도 공급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의 교직관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교직관은 어떤 것일까. 나는 ‘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지기 농사꾼이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싶다. 교사는 사춘기, 질풍노도의 미성숙한 학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부적응을 적응으로 만들어 줄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럼으로 교사는 학생들의 생명을 위해 밤낮없이 투신해야 한다. 전공교과의 충실한 교과지도는 선수가 됨은 물론, 학생지도에 있어서 시간에 관계없이 생명을 보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 맞추어 ‘땡’ 하면 출근하고 ‘땡’ 하면 퇴근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가 자기 권리만 챙기고 수당만 챙기면서,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진정한 교사의 역할을 하는 권한을 소홀이 한다면, 학생들의 생명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단위학교의 성패는 학생이 아니라 교사의 진정한 교직관에서 차별화 된다. 이 어찌 교직관이 중요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