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업 중에 만난 신부님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4,217 | 작성일 : 2008년 10월 20일
이동 수업 중에 만난 신부님
東北三省 중국 땅은 광활하기가 질려버릴 정도이다. 밤새껏 열차로 달려도 도착지의 잠을 깨우기에는 아직도 멀기만 했다. 날이 새자 차창 밖으로 추수를 기다리는 옥수수와 콩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요람처럼 흔들어 대는 열차는 북한의 최북단 南陽이 마주보이는 중국의 圖門 역에 도착했다. 조선족이 준비한 승용차로 가장 가까이서 북한을 볼 수 있다는 곳에 갔다. 龍井市를 벗어나 和龍市의 南坪 목적지까지 세 시간 달렸나 보다. 철광석으로 유명한 북한의 茂山이 눈에 들어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리는 북한 아낙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를 들을 정도의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우리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왔소!’ 라며 다가가 정답게 인사 나누고 싶은 거리였다.
북한의 산자락은 짜깁기하고 가난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쓴 밭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三合에서 내려다 본 북한의 회령 보다는 교역이 활발한 무산이 더욱 풍요롭게 보였고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한결 편했다. 북한 주민은 식량이 있으면 밥을 지을 땔감이 없고, 땔감이 있으면 밥을 지을 식량이 없단다. 닭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르는데 도둑이 많을 걸 염려해 닭 목줄을 해서 풀을 뜯긴다고 한다. 돼지를 기르는데 사람 생(生) 똥을 모아 먹이로 주는데, 그 먹이도 부족해 쟁탈전을 벌인다고 하니 이는 식량위기의 극한상황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양식을 구하려 입을 옷가지를 구하려 엄동에도 홑껍데기만 입고 두만강을 넘고 있다고 했다. 전기, 공장이 없어 옷을 생산하지 못하고 생필품은 고갈되고 팬티, 러닝셔츠, 브래지어, 생리대까지도 없다고 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와는 다르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관계는 다시 꽁꽁 얼어붙고, 대화의 빗장도 굳게 닫혀 더욱 안타까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굶어 죽어가는 절대 빈곤층사람들을 살려내야 한다.
나는 도문에서 탈북자들과 만나며 외롭게 헌신적 삶을 사는 한 사제를 만났다. 우리 학생들은 그 신부님과 2박을 함께 하며 지냈다. 우리 일행이 그분에게 솔직히 크게 봉사로 도와준 것도 없다. 다만 우리들이 그분의 삶을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1년이면 8개월은 중국에서, 4개월은 미국의 맨해튼에서 생활한다는 이 신부님은 우리들에게 북한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 신부님이 그 일에 참여한 지도 벌써 10년째라고 하며, 중국정부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중국에 머물러 있다. 신부님은 중국정부로부터 밭 909090㎡(300만평)을 50년간 임대해 낮에는 농부가 되어 밭작물을 경작하고 소를 사육하며, 밤에는 북한 동포들을 돕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은 ‘한국 성직자의 수호자, 김대건 사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었고 주일미사를 봉헌하며 순교의 삶을 닮으려 생생하게 노력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있으면 또 탈북자들이 보고 싶어 이곳으로 달려옵니다. 와서는 조선족들과 교회공동체를 이루며 삽니다.” 그분의 강론은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의 얼굴은 긴장감이 돌고 눈빛은 초롱초롱 모아졌다. 학생들은 봉사활동보다 더 큰 봉사의 의미를 배웠을 테고 더 큰 봉사자가 될 꿈도 키우며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학생들이 중국이동수업에서 얻은 경험적 수확은 가을 들녘만큼이나 풍성한 수확이 될 것이라 여겨졌다.
東北三省 중국 땅은 광활하기가 질려버릴 정도이다. 밤새껏 열차로 달려도 도착지의 잠을 깨우기에는 아직도 멀기만 했다. 날이 새자 차창 밖으로 추수를 기다리는 옥수수와 콩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요람처럼 흔들어 대는 열차는 북한의 최북단 南陽이 마주보이는 중국의 圖門 역에 도착했다. 조선족이 준비한 승용차로 가장 가까이서 북한을 볼 수 있다는 곳에 갔다. 龍井市를 벗어나 和龍市의 南坪 목적지까지 세 시간 달렸나 보다. 철광석으로 유명한 북한의 茂山이 눈에 들어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리는 북한 아낙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를 들을 정도의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우리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왔소!’ 라며 다가가 정답게 인사 나누고 싶은 거리였다.
북한의 산자락은 짜깁기하고 가난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쓴 밭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三合에서 내려다 본 북한의 회령 보다는 교역이 활발한 무산이 더욱 풍요롭게 보였고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한결 편했다. 북한 주민은 식량이 있으면 밥을 지을 땔감이 없고, 땔감이 있으면 밥을 지을 식량이 없단다. 닭을 아파트 베란다에서 기르는데 도둑이 많을 걸 염려해 닭 목줄을 해서 풀을 뜯긴다고 한다. 돼지를 기르는데 사람 생(生) 똥을 모아 먹이로 주는데, 그 먹이도 부족해 쟁탈전을 벌인다고 하니 이는 식량위기의 극한상황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양식을 구하려 입을 옷가지를 구하려 엄동에도 홑껍데기만 입고 두만강을 넘고 있다고 했다. 전기, 공장이 없어 옷을 생산하지 못하고 생필품은 고갈되고 팬티, 러닝셔츠, 브래지어, 생리대까지도 없다고 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와는 다르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관계는 다시 꽁꽁 얼어붙고, 대화의 빗장도 굳게 닫혀 더욱 안타까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굶어 죽어가는 절대 빈곤층사람들을 살려내야 한다.
나는 도문에서 탈북자들과 만나며 외롭게 헌신적 삶을 사는 한 사제를 만났다. 우리 학생들은 그 신부님과 2박을 함께 하며 지냈다. 우리 일행이 그분에게 솔직히 크게 봉사로 도와준 것도 없다. 다만 우리들이 그분의 삶을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1년이면 8개월은 중국에서, 4개월은 미국의 맨해튼에서 생활한다는 이 신부님은 우리들에게 북한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 신부님이 그 일에 참여한 지도 벌써 10년째라고 하며, 중국정부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중국에 머물러 있다. 신부님은 중국정부로부터 밭 909090㎡(300만평)을 50년간 임대해 낮에는 농부가 되어 밭작물을 경작하고 소를 사육하며, 밤에는 북한 동포들을 돕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은 ‘한국 성직자의 수호자, 김대건 사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었고 주일미사를 봉헌하며 순교의 삶을 닮으려 생생하게 노력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있으면 또 탈북자들이 보고 싶어 이곳으로 달려옵니다. 와서는 조선족들과 교회공동체를 이루며 삽니다.” 그분의 강론은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의 얼굴은 긴장감이 돌고 눈빛은 초롱초롱 모아졌다. 학생들은 봉사활동보다 더 큰 봉사의 의미를 배웠을 테고 더 큰 봉사자가 될 꿈도 키우며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학생들이 중국이동수업에서 얻은 경험적 수확은 가을 들녘만큼이나 풍성한 수확이 될 것이라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