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놀게 그대로 둡시다.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775 | 작성일 : 2009년 9월 8일

                          더 놀게 그대로 둡시다
 
  부모가 자녀를 양업에 보낼 때는 학교의 교육철학을 살피고 학교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양업에 다니는 자녀가 방종할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갈등하게 되고 급기야 자녀를 강제해서라도 간섭하고 싶을 것이다. 주말이면 집에 오는 자녀가 집에서 무질서하게 지내다 귀교한다고 문 밖을 나선다. 그 모습을 보는 부모는 양업이 자녀에게 무절제를 키워준다는 생각을 하고는, 입학 전에 지녔던 본래의 틀 속에 자녀를 가두려고 한다. 전혀 이런 교육방법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부모는 불안한 것이 당연하리라. 양업을 떠날 준비를 하는 3학년들도, 이미 졸업한 부모들은 우리의 교육철학을 신뢰하고 자녀가 자율적 인간이 되었다고 행복해 하는데 말이다.
  며칠 전, 8기 졸업생 학부모의 다수가 함께한 모임에 초대되어 갔다. 이들 학부모는 자주 이렇게 만난다고 했다. 학부모들은 이구동성으로 양업 덕분에 행복해졌다며, 특히 자녀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고마워했다. 내가 그들 모임에 초대되어 간 것도 부모들의 행복한 마음을 보기 위해서였다. 미래의 진로를 찾아 대학생활을 잘한다는 이야기며, 해병대, 공수특전단의 혹한훈련도 잘 적응한다는 이야기며, 나누는 이야기를 듣노라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그들 부모도 자녀가 1학년 때는 학교 교육철학에 대하여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 부모님들은 불안감속에서도 학교교육철학을 신뢰했다. 그들의 자녀들이 1학년 때 상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렸을 때라도 부모들은 학교에 대한 신뢰를 견고히 했다. 학부모가 이런 분들이었기에 제8기생들은 40명이 입학하여 38명이 졸업하였고, 졸업생과 학부모들은 지금도 이렇게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매년 1학년 학부모들은 여전히 불안해한다. 학교를 포기할까 망설이는 부모도 있다. 처음 양업에 지원했던 부모의 주장은 공교육이 문제라며 지원 이유를 밝혔었다. 그런데 한 부모는 자녀를 공교육 현장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 일을 보고 1학년 급우들도 안타까워했다. 그 부모를 이해시키려고 모든 선생님들이 노력했고, 졸업생 학부모도 동원해보았다. 또한 재학생들이 전학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자율인으로 비상해줄 양업에서의 큰 날개를 접었다. 학생의 전학은 서류에 도장 찍는 일로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그를 오래도록 붙들고 설득하는 노력은 그 학생이 건강한 학생, 행복한 학생으로 남게하려는 우리들의 열정 때문이다. 학생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주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고 부실한 현실태를 무한한 가능태로 만들어주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그 학생이 왜 양업에 왔는지 잘 알고 있다. 아직은 그가 철이 없어 실컷 놀고 싶어 했다. 아직은 철이 없고, 목적도 없고, 방종하고 있었다. 아직은 수업시간에 배우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사실 자녀가 중학교 시절에 학부모의 철저한 간섭과 통제를 받던 경우였다.  그는 일반학교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양업에 왔었다. 그러기에 그가 철들 때까지 더 신나게 놀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우리들의 노력을 뒤로한 채 부모가 자녀를 빼내갔다. 학원에도 보내야 하고 훌륭하게 키워본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 학생에게는 “자유스러운 학교”를 더 필요한 것이다. 그 학생은 자유분방해서 좀더 늘도록 기다려야 하고 더욱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을 떠났다. 지금의 보여지는 방임이 불안해서 지식만을 먹고 자라나는 공교육 학생이 된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성숙을 급조하고 싶겠지만, 건강한 성장과 성숙은  기다림 속에 성실함으로 자라남을 간과하고 있다. 양업만큼 각각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학교가 어디 그렇게 흔하게 있겠는가. 전학 간 학생들이 양업을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노는 것 같지만 자율인이 되어가는 동료들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