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이 아니라 사고의 성숙함을

작성자 : 후원회 | 조회수 : 3,634 | 작성일 : 2007년 9월 4일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이다. 성경을 봉독하시러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말씀을 찾으셨는데,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회당에 있던 모두는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런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말로 그분을 고정시키자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으로 그들의 완고함을 풀어주시려 예언자 시대의 예를 들어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은 화가 잔뜩 나 그분을 벼랑 끝에 세웠다. 그분께서는 꿈에 그리던 고향방문을 접으시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무엇이 참 좋으신 예수님을 고향에서 떠나게 하신 걸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분일까?’ 진지하게 대하고 경청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며 공감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마음으로 듣지 않고, 상대를 고정화시켜 상대의 말을 단정 짖고 마음이 아닌 귀로 들으려 한다. 게다가 상대방이 자기를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 태도에 무례함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화를 내며 그를 따돌리려 한다. 그러다보니 화가 잘 나고 잘 삐지며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일상화되어 버렸다.
 자기만 생각하고 상대방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내가 많이 늙었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릴 적 생각으로 예수님을 고정시키니 금방 단절이 이루어졌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 자체가 고정화된 것을 뜻한다. 내가 변한다면 상대방도 변한다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다 늙은 사람들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도 없이 귀만 살아가지고 들리는 말이 비위를 건드리니 쉽게 화를 터뜨리는 것이 아닐까.
 점점 자라나는 세대들은 놀랍게 변하고 있다. 부모와 교사들은 점점 옛 사고에 머물러 있다. 결코 대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고정된 사고를 가지고  자기 주장을 펴는 사람이 아니라, 침묵하며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하고 배려하며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나는 사람을 앉혀 놓고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가 부쩍 많아졌다. 아이들이 멀어졌고 나는 외롭다. 나이가 들면 늙어짐의 모습이 아니라 상대방과 더 잘 가까이 할 수 있는 사고의 성숙함으로 침묵이 더 필요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