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르다는 것을

작성자 : 윤병훈 | 조회수 : 3,497 | 작성일 : 2008년 1월 29일

세상이 너르다는 것을

  그 어린 시절, 사람도, 세상도 모두 청정했을 때였다. 눈이 왔다하면 폭설이었고, 동심은 눈을 내려주는 하늘을 닮아 영혼도 깨끗했었다. 꼬마들은 눈밭을 뛰놀며 언덕이 있는 곳이면 빙판을 만들고는 하루 종일 신나게 미끄럼을 탔었다. 나무숲이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면, 친구들을 나무 밑으로 유인하여 눈을 뒤집어쓰며 놀았었다. 그때의 동심에 기억된 설국은 이제 지구 온난화로 먼 기억 속에만 있게 되었다. 지금은 그 전처럼 사람도, 세상도 청정하지 못하다.
  이 곳 북해도에 온 것은, 우리 학생들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北海島(홋카이도)의 겨울이 너무 청정할 것 같다는 순박한 생각도 있었다. 북해도 중심 도시인 旭川(아사이카와)에 도착했을 때, 하늘도 땅도 더 깊은 설국이었다. 1미터가 넘게 실히 쌓인 눈길 덕분에 혹한이지만 생명을 감싸 안은 이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名寄(나요로)의 아침온도는 영하 38도였다. 겁도 없이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턱이 없어진 듯 감각이 없어 집으로 뛰어 들어 왔다. 설국에 꼼짝 없이 방에 갇혀있는 신세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은 기우였다. 지방정부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밤새 눈을 치운 덕분에 사람들은 80킬로의 속력으로 눈길을 달리고 있었다.
  오츠크海가 길게 늘어진 해안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인공적으로 가꾸어진 조림목이 자연과 조화되어 빼곡히 자리고 있었다. 전나무, 낙엽송, 구상나무, 자작나무가 겨울옷을 입고 버티고 있었다. 슈마리니아 호수를 보러 가다가 눈(雪)이 우리의 진로를 가려 더 이상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곳은 1945년 일본으로 징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 수탈로 호수와 철도가 놓아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식을 듣고 나니, 눈이 우리의 앞길을 막은 것에 새삼 감사하며,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조용히 명복을 비는 미사를 봉헌했다.
  프랑스풍의 농촌 풍경, 그 곳도 모두들 기업 농업이다. 낙농을 하는데 우리처럼 우유만 생산하고 끝나버리는 단순 낙농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젖을 짜고, 버터, 치즈를 만들고, 소시지, 밀크캐러멜, 육가공의 브랜드 상품을 수북이 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들을 만드느라 일자리 창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과잉생산에 판로가 막히면 생산비도 건지지 못했다며 거리로 나오는 단순농업의 우리네 농부들의 처지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네 공부도 그렇다. 왜 이런 지독한 공부를 하는 지도 모르고 공부만 하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 교육도 단순 농업과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설국으로 파묻힌 농촌의 풍경에 담겨진 풍성한 부가가치 창출의 모습을 바라보며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오사카의 청심대학교, 나고야의 남산대학교, 동경의 순심여자대학교, 홋카이도의 나요로 대학교, 그리고 홋카이도의 대안학교인 가정학교(부지 33만 ㎡, 학생수 56명)를 둘러보았는데, 이들 학교들은 가톨릭과 관련이 있는 명문 대학들로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이번 우리학교 졸업반인 학생 한 명을 1학년 전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양측 학교와의 협약을 체결하고 이루어진 성과이다. 입학과 장학생으로의 조건만 갖추면 학생들이 날개를 달 수 있을 텐데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학생들에게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세상 살아가는 창의성 창출의 방법을 직접 보여줄 것이다.
  대안학교인 가정학교, 엄청나게 너른 학교부지, 자연친화적인 공간, 사람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공존, 아무리 큰 상처라도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자연은 사람들을 겸허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좁디좁은 공간과 성냥갑 같은 아파트, 숨이 막히는 교실과 학원, 청소년들이 얼마나 상처가 클까!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할 일도 많고 세상이 너르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살 것이다.